양민학살 동반·국가권력을 확립 이용 등이 유사… 5·18과 달리 후대 기억투쟁 이뤄지지 않아 4·3 뒤늦게 재조명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았다.문재인 대통령은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힌 것과 마치 데자뷔처럼 겹치는 장면이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광주에서는 지난 2일 ‘제주 4·3 제70주년 광주지역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추모주간을 선포했다.
이들은 4·3과 5·18은 정의로운 진실규명과 치유, 역사적 자리매김과 전국화 세계화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양민에 대한 학살과 피해 지역을 고립해 역사 속에 묻었던 양태는 제주 4·3이나 광주 5·18이나 무척 닮은꼴“이라고 지적하는 등 정치권도 잇따라 4·3과 함께 5·18을 언급했다.
1948년 4·3과 1980년 5·18, 32년 세월의 격차에도 닮았지만 다른 기억을 가진 사연을 이성우 고려대 평화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의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투쟁: 5·18과 4·3 비교연구’를 통해 살펴봤다.
◇ 서로 닮은 4·3과 5·18
해방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 중에 광주와 제주에서 벌어진 4·3과 5·18은 대규모의 양민학살을 동반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권력을 확립하는 데 이용했다는 점 등이 유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4·3사건은 해방 직후 불안정한 정치적 지형, 즉 남북분단과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의 국면에서 발발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전후하여 제주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촉발된 4·3항쟁은 조국통일과 완전독립을 위하여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선거를 거부하고 미 군정에 저항하는 제주민중의 무장투쟁으로 시작됐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군대와 경찰력의 반공주의에 입각한 초토화 작전으로 양민이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5·18은 군사정권의 장기독재와 억압체제에 대한 민중적 저항투쟁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국가테러가 자행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자 출발점은 5월 17일 계엄령의 발효였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들에 반대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탄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광주지역에 배치된 계엄군은 대학교정에 배치되어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계엄군이 최초로 시민과 학생들에게 직접 발포하면서 계엄군의 민중학살은 시작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여 저항했지만, 결국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주민의 공동체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고, 무장투쟁이라는 치열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 후대의 기억이 4·3과 5·18 평가를 갈라
과거 국가는 제주를 일방적으로 반국가적 ‘공산폭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규정지어 버렸다.
이러한 규정은 국가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확고한 공식규정으로 1980년대까지 거의 40년 동안 반공주의 지배 담론의 중요자원이 됐다.
4·3에 대한 제주도민의 기억은 가능한 되살리고 싶지 않고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이 돼 버렸다.
정기적인 추모식도 치르지 못했고, 관련 요구를 담은 집회와 시위는 생각지도 못했다.
4·3에 대한 공식기록과 다른 평가는 2003년에서야 이루어진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가 확정되면서 그동안과 다른 새로운 평가가 나오게 됐다.
결국 사건 이후 전개되는 기억투쟁의 이뤄지지 않으면서, 4·3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확대될 수 없었고 새로운 평가도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이 연구논문을 작성한 이 교수는 주장했다.
광주 5·18에 대한 국가의 첫 번째 규정 또한 ‘광주사태’였다.
전두환 정권은 초기부터 5·18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다음 해부터 이러한 ‘폭동론’을 부정하려는 기억투쟁을 끊임없이 전개됐다.
5·18에 대한 기억투쟁이 곧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이었기 때문에 5·18의 역사적 의미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확대되었고, 그 결과 좀 더 빠르게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게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제주 4·3평화공원에서 거행된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추념사를 통해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천명했다.
5·18을 시작으로 민주화의 봄이 왔듯, 우리는 제주에 봄을 위한 기억투쟁을 다시 시작한 셈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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