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안보’ 맡은 정보기관이 ‘국정 홍보’에 주력
“종북좌파를 척결하고 제도권 진입을 막아라”국가정보원의 정치·대선 개입 의혹은 ‘종북세력’에 대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과도한 집착과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돼 국정원 직원들이 동원된 ‘조직적 불법 행위’였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14일 원 전 원장이 북한의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은 물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 시민단체, 노조 등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국정 흔들기’에 동조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종북 세력으로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불법적인 지시가 이뤄졌고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인터넷에서 대북심리전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선거 개입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정권에 대한 원 전 원장의 ‘과잉 충성’이 국정원 전체에 ‘불법 행위를 자행한 조직’이란 불명예를 안긴 셈이다. 이는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광범위한 국정 관여로 ‘정보 정치’, ‘공작 정치’라는 국민적 비난에 직면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이상한 국정원 운영 방침 “공격적으로 수행하라” = 원 전 원장의 국정원 운영방침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초대 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할 때 근간이 세워졌다.
시초는 ‘광우병 촛불 사태’였다. 원 전 원장은 행안부 장관 시절에 터진 이 시위가 종북좌파들의 선전·선동으로 일어났다고 인식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원 전 원장은 2009년 2월 국정원장에 취임한 뒤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 수행을 방해하는 종북좌파에 대해 효과적인 국정홍보 대응체계를 구축하는 게 국정원의 중요한 과업이라고 봤다.
이는 “국정원의 임무는 정부 정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넓은 시각에서 업무를 더 공격적으로 수행하라”는 지시(2009년 5월15일 부서장회의)에서 잘 드러난다.
’종북세력’에 대한 인식이 왜곡됐다. 종북좌파의 범위를 확대 해석하고 이들의 제도권 진입을 차단하는 게 중요 과제였다.
원 전 원장은 종북좌파들의 주된 활동 무대가 인터넷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사이버상의 국정 홍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3차장 산하의 심리전단을 확대 개편했다.
취임 한 달 만에 심리전단을 독립 부서로 만들고 산하의 사이버팀을 2개팀으로 늘렸다. 사이버팀은 규모가 계속 커져 지난해 총선 및 대선을 앞두고는 4개팀, 총 70여명으로 커졌다.
◇매월 전체 부서장 회의서 ‘원장님 지시’ 하달 = 원 전 원장은 매월 열리는 전 부서장 회의에서 각종 지시 사항을 시달했다.
이 지시는 실·국장의 산하 팀장 회의, 팀장 주재 회의 등을 거쳐 전 직원에게 전파됐다. 내부 전산망에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띄웠다.
지시는 이종명 전 3차장, 민모 심리전단장, 사이버 팀장을 거쳐 각 팀원에게 배당됐다. 주요 활동 결과는 원 전 원장에게 보고됐다.
팀원들은 각자 맡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게시글을 모니터링하면서 댓글과 게시글을 쓰거나 추천·반대 클릭을 했다.
◇선거 개입의도 지시 12차례 = 검찰은 원 전 원장이 전 부서장 회의에서 한 발언을 묶은 ‘지시·강조 말씀’을 토대로 주요 혐의를 구성했다.
원 전 원장은 세종시나 4대강 사업,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 등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해 정부 입장을 옹호하고 반대 세력에는 적극 대응을 지시했다.
2010년 1월 22일 “세종시 등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 단체들이 많은데 보다 정공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음.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과 정부 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할 것임”이라고 지시했다.
원 전 원장은 2009년 5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10차례나 정치관여 지시 관련 발언을 했다.
선거 개입 의도로 보이는 지시도 2010년 1월부터 지난 대선 직전까지 12번이나 하달됐다.
”종북 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하는데 금년에 확실히 대응 안 하면 국정원이 없어진다”(2012년 2월17일), “종북좌파 세력이 국회에 다수 진출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우리 사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2012년 6월15일) 등이다.
◇직원들 네티즌 가장해 ‘댓글 자작극’ = 심리전단 직원들은 평범한 네티즌을 가장해 ‘댓글 자작극’을 벌였다.
이들은 원 전 원장의 지시를 대응 논지와 함께 하달받아 외부 조력자들과 함께 댓글 작업으로 이행했다.
지난해 8월말 심리전단의 외부 조력자인 이모씨는 ‘오늘의 유머’에 접속해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시 업적을 썼고 같은 날 사이버팀 직원 3명이 ‘추천’을 클릭했다.
직원들이 직접 정치나 대선 관련 글을 올리기도 했다.
직원 김모씨는 지난해 11월6일 ‘오유’ 사이트에 “48번째 해외 순방? 진짜 대단한듯”이라는 제목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외교력이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이모씨는 지난해 11월23일 ‘오유’에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천안함 폭침 후 나온 5.24 대북 제재 조치까지 해제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어떤 후보가 우리 안보와 국익을 수호하고 책임질 수 있는지를 눈여겨봐야…”라는 글을 올려 문 후보의 공약을 비판했다.
직원들은 ‘오유’ 등 15개 사이트에서 5천179건의 글을 올렸다. 이 중 정치 관여 글이 1천704건, 대선 관련 글은 73건이다.
민주당이나 문 전 후보를 반대한 글이 37건, 통합진보당이나 이정희 후보를 반대한 글은 32건,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표를 비방한 글은 4건이었다. 지난해 9월 3건, 10월엔 9건이었지만 대선이 임박한 11월 24건, 12월 35건으로 급증했다.
찬반 클릭도 5천174건(대선 관련은 1천281건) 이뤄졌다.
검찰은 직원들의 불법 활동에 대해 최종 책임자인 원 전 원장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내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