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대한민국 수립’ 표기 놓고 학계 양론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이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뀐 데 대해 역사학계의 평가는 극명히 엇갈린다.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진영 측에서는 이번 표현이 “건국 사실을 늦게나마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환영한 반면 반대진영은 ‘건국’이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쓸 수 없어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으로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교육부가 28일 공개한 ‘올바른 교과서’에는 ‘1948년 8년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됐다’고 기술됐다. 기존 검정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라는 표현에서 ‘정부’라는 용어가 빠졌다.
교육부는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됐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국가’가 완성됐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한민국 수립’으로의 변경 당위성을 강조했다. 보수 진영에서 말하는 ‘1948년 건국설’과 맥이 맞닿아 있는 설명이다.
1948년 건국설은 뉴라이트 계열의 보수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입장으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망명정부이고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근대국가의 구성요소를 갖춘 것은 해방 후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조선일보가 1995년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기획기사에서 “1948년 8월 15일은 어디론가 실종돼 버렸다. 자신의 건국기념일을 정부에서조차 제대로 기념하지 않는 나라! 이게 1995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라고 지적한 것이 ‘건국절’ 논란의 발단이 됐다.
이후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8·15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주장하며 논의에 불을 지폈고, 이명박 정부가 2008년 8월 15일에 건국 60주년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논란이 확산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1950∼1960년대 교과서를 보면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했는데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며 “1948년에 공식적으로 건국된 것을 부족하나마 제대로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수립’ 또는 ‘대한민국 성립’이라는 용어는 1차 교육과정(1956)부터 7차 교육과정(2009)까지의 시기에 사용됐다.
1948년 건국설 반대진영에서는 이번 표현이 뉴라이트 계열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명시적으로 ‘건국’이라는 말이 없고 예전 교과서에서도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쓰인 적이 있지만 이 의미를 ‘국가의 완성’이라고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쓰고 싶지만 반대가 심해 쓸 수 없고 ‘정부수립’이라고는 안 하고 싶으니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꼼수’를 부린 것”이라며 “과거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에는 건국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보수 진영이 1948년 건국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 건국 시기에 대한 논란은 거의 없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민주권 원리를 내세운 것을 대한민국의 성립으로 보는 것이 그 당시까지의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은 기미(1919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며 1919년 대한민국 건립과 1948년 재건을 명시해놓고 있다.
근대국가라는 개념의 측면에서 보면 현재 우리 헌법에서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규정하고 있어 1919년 임시정부뿐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도 온전한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고 1948년 건국설의 반대진영 측은 지적한다.
나아가 1948년 건국설에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판한다. 1948년을 건국으로 기념하게 되면 일본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대한민국 건국공로자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이들 중에는 친일 세력들이 적지 않게 포함돼 있다.
또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이 배제된 까닭에 이들의 독립투쟁과 해방 후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된다.
안병욱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서 박정희 군사정권,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는 우익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탄생신화를 역사적으로 공인받으려고 하는 것이 1948년 국가수립론”이라며 “이승만 등 우익세력이 좌익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국 정부를 만든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논리”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