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정태헌 교수 분석
“(유신체제가 선포되기 전 발표된) 8.3조치는 재벌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 금융위기의 탄생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박태균 교수)”유신체제하에서 정경유착이 어우러진 수직 질서하에 놓인 자원 배분구조는 민주화가 극도로 억압된 박정희 시기 당대에는 ‘성과’를 보였지만 이후에는 지속 가능할 수 없었다.(중략) ‘국민경제’는 휘청거렸고 1997년 외환위기는 그 정점이었다.” (정태헌 교수)
’10월 유신’ 40주년을 맞아 유신체제의 경제적 측면을 분석한 연구논문이 나란히 발표됐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 등 4개 역사단체가 유신 40주년을 맞아 14-15일 주최하는 연합학술대회에서 연구논문 ‘유신체제를 위한 경제적 토대의 마련: 8.3조치와 산업합리화 정책’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박 교수는 유신체제가 경제적으로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고찰했다.
박 교수는 “유신체제와 같은 비정상적인 체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특수한 형태의 경제체제”가 필요했다면서 1972년 10월 유신에 앞서 그해 8월 발표된 8.3조치와 산업합리화 정책에 주목했다.
흔히 ‘사채동결조치’로 불리는 8.3조치는 기업 재무구조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된 사채를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으로 동결하거나 출자전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특별조치.
박 교수는 “8.3조치에서 사채를 동결시킨 것은 근본적으로 기업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당시 청와대에 부실기업 정리를 위한 비서실을 만들 정도로 부실기업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외채가 급증하고 기업의 채산성이 약화되면서 부실기업이 급증했다.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걸었던 박정희 정부로선 부실기업을 정상화시키거나 퇴출함으로써 수출 드라이브를 계속 걸어야 했다. 8.3조치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특별 조치였다.
그러나 사유재산인 사채를 동결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박 교수는 결론적으로 8.3조치는 “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넘긴 상황에서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준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8.3조치는 기업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 당시 정부의 주장이었다”면서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정책과 기업의 방만한 활동으로 인해 조성된 상황이 오히려 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부과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8.3조치는 대기업에 가장 큰 혜택을 줬으며 ‘재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이때였다.
박 교수는 “8.3조치는 거듭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그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이를 기업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 미봉했던 수많은 과정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서 이는 결국 1997년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위기로 다가왔다고 진단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인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경제발전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유신체제와 그 유산’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박정희 시대는 본질적으로 특히 경제를 위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라고 역설했다.
정 교수는 ‘경제성장은 독재 때문에 가능했다’는 일각의 분석에 대해 “흔한 착시현상”이라고 일축하면서 “실제로 한국의 경제발전이 질적 변화를 보인 것은 민주화 운동이 확대된 1980년대 이후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역대 대통령 집권 기간 연평균 실질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로 경제규모가 작았던 박정희 시대가 결코 두드러진 것이 아니라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또 박정희 시기 무역적자가 233억 달러였던 반면 재임기간이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던 김대중 시기에는 846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정 교수는 8.3조치 등 대기업에 집중된 조세감면 혜택이 점차 기득권으로 고착되어 갔고 자원배분의 합리성이 떨어졌으며 결국에는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