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공동회견 “세계사 흐름 역행하고 최근 연구성과도 미반영…함량미달”
정부가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두고 학계와 교사 단체들의 강도 높은 비판이 사흘째 이어졌다.논란의 핵심인 한국 현대사 부분의 박정희 통치 시기 외에도 고려 등 전근대사와 세계사 기술에서도 최근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않거나, 오류가 많고 세계화 흐름에도 역행하는 대목이 많아 ‘함량 미달’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역사교육연대회의, 한국서양사학회, 고고학고대사협의회는 30일 동대문구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28일 공개한 역사 국정교과서의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먼저 국정 교과서는 글로벌 시대에 한국사를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도가 크게 부족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강성호 한국서양사학회장(순천대 교수)은 “고교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세계사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된 한국근현대사를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서술돼 있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개화기 조선과 대한제국의 시련과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관계 설명이 누락됐거나, 1960년대 세계에서 발생한 혁명 중 하나였던 4·19 혁명에 대한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맨 마지막 장이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기여하는 한국’이라고 돼 있긴 하지만, 국수주의적 역사는 글로벌 미래 세대에게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고 지적했다.
세계사적 맥락은 결여한 채 한국이 인류공영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논리를 비약할 경우 청년세대에게 협소한 역사관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강 회장은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대해서는 “세계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를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데다 이번에 나온 교과서는 기존 교과서들보다 세계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하는 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21세기 국제사회에서 점점 부각되고 있는 동남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 대해 “국정교과서가 광범위하고도 철저한 무관심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사 부분에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의미를 깨우치려 하기보다는 단순 사실 나열에 그치는 문제도 거론됐다.
가령, 영국혁명과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의 의의와 이념, 역사적 한계 등에 대한 설명이 누락돼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근대 부분에서는 최신 연구성과 미반영, 편찬기준 미준수 등의 문제가 새로 지적됐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교과서 공개 3일 전에야 뒤늦게 공개된 편찬기준마저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고려의 토지제도인 공음전을 예로 들었다.
편찬기준에 ‘공음전은 공로를 세운 관료에게 지급하는 토지임에 유의한다’고 돼 있지만, 교과서에는 ‘고위 관료들에게 지급돼 세습이 가능했던 공음전’으로 기술돼 편찬기준을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한 “고려시대 집필자 3명이 모두 은퇴한 고령의 학자로 최신 연구성과를 소화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며 “2000년대 고려시대사 연구경향은 국제관계사, 친족제도, 여성의 지위 등이지만 이 분야 성과들은 거의 반영되지 않고 오히려 기존 교과서보다 퇴보했다”고 지적했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현대사 부문에서 국가폭력과 인권탄압 서술누락을 큰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등 국가폭력사건을 전혀 서술하지 않았다”며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된 사건임에도 일체 서술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현대사 부분 서술만 보면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반공과 안보라는 냉전 논리에 입각한 국방부의 정훈교과서 같다”고 혹평했다.
김태우 전국역사교사모임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국정교과서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그는 “정부가 사실에 입각한 교과서라고 홍보했지만, 줄어든 현대사 영역에서 박정희 관련 서술은 크게 늘리는 대신 6월 항쟁 이후 30년 세월은 4쪽 안팎에 불과하다”면서 “박정희란 단어를 20회 이상 사용하면서 긍정적 의미로 쓰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역사교사모임의 분석에 따르면 고교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세계의 변화’라는 단원에서 박정희 서술분량이 9페이지에 이른다. 미래엔출판사가 출간한 기존 검정교과서의 6쪽에 비해 서술이 크게 늘었다.
역사교과서 자체 분량이 검정교과서보다 20% 가량 준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에 대한 기술이 대폭 늘어난 셈이다.
김 교사는 “정부주도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기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안보를 지키며 산업화를 하기 위해서는 유신독재가 불가피했다는 식으로까지 논리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서술 등 일부 내용의 경우 중학교 교과서보다 고교 교과서가 더 부실한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의 오류 문제도 다수 지적됐다. 박근혜 정부가 2015 개정교육과정 적용 시기인 2018년보다 무리하게 1년 앞당겨 국정교과서를 보급하려다보니 졸속으로 교과서 편찬이 이뤄져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역사교사모임 김태우 회장은 “고교 한국사 190쪽에는 안중근의 사진과 유묵을 보여주며 ‘동양평화론’을 자서전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자서전이 아니라 안중근의 미완성 논책(시사 문제를 논한 글)”이라고 지적했다.
통합임시정부 출범 이후 도산 안창호의 직함 역시 현장검토본은 내무 총장으로 적시했지만 실제로는 노동국 총판이었다고 김 교사는 지적했다.
강성호 서양사학회장은 “함무라비 통치보다 400여 년 전에 우르남무 법전이 발굴됐으므로 함무라비 법전을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기술한 것은 오류”라고 설명했다.
또한, 기원전 477년에 결성된 델로스동맹이 기원전 500년 직전에 결성된 펠로폰네소스 동맹보다 앞선 것으로 서술된 것도 명백한 오류로 지적됐다.
김장석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도 고교 한국사 국정교과서가 동아시아에서는 서남아시아보다 농경이 늦게 시작됐다고 쓴 데 대해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남중국의 쌀 재배는 서남아시아 농경 발생보다 최소한 천 년 이상 빠르며, 이 사실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역사학계의 국정교과서 비판이 과도하며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입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해명자료에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독재정치와 그로 인한 자유민주주의의 시련을 분명히 서술했다”고 반박했다.
국편은 “유신체제를 독재체제로 명시하고 당시 국민의 기본권이 대통령의 긴급 조치에 의해 제한됐음을 서술했다”며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과 당시 진행된 반(反)유신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관련 사진 및 사료와 함께 풍부하게 제시했다”고 밝혔다.
보수진영에서는 28일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기존 검정교과서들의 ‘좌편향’을 극복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한 점이 인정되는데 이런 노력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사장되고 있다는 인식이 많은 편이다.
이런 가운데 사회적 논란 속에 국가가 비용을 들여 제작한 국정 교과서를 나오자마자 폐기 처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존 검정교과서들과 국정교과서 중에 일선 학교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자율에 맡기는 것이 보다 실용적인 접근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교육부도 단일 국정교과서의 보급 대신 적용 시기를 미뤄 일부 시범학교에 적용하는 방안, 기존 검정교과서와 혼용하는 방안 등을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지난 28일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는 고려한 적이 없다”면서도 “다만 현장에서 우리가 노력해서 만든 질 좋은 교과서가 교육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