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무덤 있는 3천년 고도…유적 산재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방문하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은 어떤 매력을 지닌 곳일까.시안은 진시황(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의 무덤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1m만 파도 유적이 쏟아진다는 시안의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화청지를 비롯해 시안성벽, 종루, 대안탑, 비림 등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시안이 유구한 중국 역사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그 중에서도 시안을 세계에 알린 것은 뭐니뭐니해도 진시황 무덤과 병마용갱이다.
병마용갱은 린퉁현(臨潼縣)에 있는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를 말한다.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
진시황릉 1호갱의 병마용 숫자는 모두 6천개 가량으로 당시 진나라 군대 1개 군진 규모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은 뒤 항우가 상당수 파괴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진시황이 묻혀 있다는 진시황릉 병마용박물관 앞에 선 가이드는 “수천점의 진흙 병사들이 발굴됐지만 정작 진시황의 무덤 발굴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며 안내를 시작한다.
1호갱은 길이 210m와 너비 60m에 깊이 4.5∼6.5m의 총면적 1만2천㎡ 면적으로 본래 이 갱 위에는 같은 길이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지만 불에 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진시황릉 유적지의 규모는 방대하다. 입구에서 황릉까지 전기차를 타고 가야할 정도다.
그러나 황릉 외에도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정문 앞의 기념품점으로 여기에는 황릉을 처음 발견한 농부가 발견 당시 상황을 영웅담처럼 들려준다.
2천200년이 지난 황릉은 지난 1974년 4명의 농부가 함께 발견하고선 신화통신 기자에게 알렸다. 그 중 이 농부만이 현재 생존해 있다.
이 농부와 기념촬영을 하려면 먼저 진시황릉 책자를 구입해야만 한다. 악수 정도는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
병마용들은 처음 보면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모두 다 다르고 각자의 역할에도 차이가 있다.
맨 앞에는 투구나 갑옷이 없는 일반 병사들이 있다. 그 뒤로 말이 따르고 그다음에 서 있는 것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다. 신분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는데 머리를 두갈래로 한 것이 장군이다.
1호갱 발견 2년 뒤인 1976년에는 1호갱 바로 옆에서 길이 96m, 폭 84m의 2호갱이 발견됐다. 2호갱은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으나 전차와 기마병 등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후 잇따라 3호갱과 4호갱도 발견됐으나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는 않고 있다. 학자들은 이런 병마용갱이 수백개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진시황이 안치된 곳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진시황이 있는 곳이 수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다.
중국은 황릉 발굴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 원형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갖춰지지 않은 만큼 급하게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첫 황릉 발굴 당시 병마용이 화려한 색상이었으나 공기에 노출되자 마자 염료 산화로 색을 잃어간 전례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