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장기화 땐 악성부채 양산…금융불안 심화
금융위원회가 17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완화한 것은 침체한 부동산 경기를 살려보려는 고육지책이다.직장인의 미래 소득까지 반영하고, 보유 자산의 가치를 소득으로 인정해 대출 한도를 넓힌 것은 최소한 부동산 구매 여력을 높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기에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늘어난 대출 한도만큼 ‘악성부채’가 많아져 이번 조치는 ‘양날의 칼’인 셈이다.
게다가 부동산 실수요가 적고, 일정 소득도 없는 고령자들이 대출을 받아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겠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부동산경기 활성화에 일정 부분 숨통
금융위 규제 완화 방안의 골자는 DTI를 적용할 때 40세 미만 무주택 직장인은 ‘10년 뒤 예상소득’을 반영하고, 은퇴 등으로 급여 등 소득이 없는 대출자에게는 자산소득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DTI란 대출상환액이 소득의 일정 비율을 넘지 않도록 제한하려고 금융부채 상환 능력을 소득으로 따져 대출 한도를 정하는 계산 비율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연간 소득이 5천만 원이고 DTI를 40%로 정했다면 총부채의 연간 원리금 상환액은 2000만원을 넘지 않도록 대출 규모가 제한된다. 현재 DTI 비율은 서울 50%, 인천ㆍ경기 등 수도권 60%이다.
이번 조치로 미래소득과 자산소득이 인정된 부분만큼 실제 DTI 비율이 높아진다.
20∼30대 직장인과 50대 후반 이후 고령자들의 대출 한도를 높여 부동산 구매력을 늘리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부동산 구매자금뿐만 아니라 창업 등 생활자금 대출 한도까지 올리는 부수효과도 있다.
미래소득과 새로 인정된 자산소득을 전제로 대출 희망자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산가들은 자산소득으로, 젊은 층은 향후 소득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대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 활성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일단 외형상으로는 가계부채가 늘어나겠지만 자산가와 청장년층이 연체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팀장은 “이번 조치는 부동산 경기를 연착륙시키고 가계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할 수 있지만 실제 주택 거래량과 가격 상승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정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주로 부동산 자산을 보유한 은퇴ㆍ고령자들에겐 정책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LG경제연구원 이근태 연구위원은 “금융자산이 많은 고령ㆍ은퇴자는 돈을 빌릴 필요없이 부동산을 살 수 있겠지만, 그외에는 부동산 자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부동산을 사게 하는 것이어서 효과가 크지 않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보유자산을 유동화해 노후를 준비해야 할 고령자들이 추가자산(부동산)을 더 확보하도록 하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기 회복 안 되면 금융 불안정 심화
금융위 등 당국이 노리는 이러한 선순환 효과가 현실화할지는 미지수다.
특히 이른 시일 내에 경제가 활성화하지 않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경제가 침체해 소득증가율이 낮아지면 DTI 기준은 종전보다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 의도와 달리 경기침체로 부동산 경기가 더욱 나빠지면 이번 조치로 늘어난 추가 대출은 고스란히 악성부채로 둔갑할 수 있다.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안정화하고 미래소득까지 늘어나면 긍정 효과를 낳게 되지만 반대 경우라면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악성부채 발생 등 금융불안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경제회복이 관건이다. 장기 불황 땐 일본처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더욱 내려가면서 부채만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 주체들이 보유한 자산의 80%가량이 부동산에 집중돼 있어 자산가치 하락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경제가 회복되지 않아 소득이 늘지 않으면 또다시 대출상환이 어렵게 돼 결국 가치가 떨어진 보유자산을 팔아 빚을 갚아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우려했다.
LG경제연구원 이근태 연구위원은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이번 조치로 더욱 부동산을 늘리게 될 것으로 본다”면서 “그러나 이 경우 유동성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부동산가격이 급락하면 더욱 안좋은 상황이 생긴다”고 말했다.
◇가계부채에도 악영향 우려
이번 DTI 규제 완화로 일단 대출수요가 늘어나 가계대출 총액은 늘어나게 된다. 미래소득과 자산소득 등 소득 인정액이 증가해 대출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장기화하고 대출금리가 경기상황에 따라 급변동하면 그만큼 가계주체의 상환 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예상소득을 DTI에 반영하는 대출이 만기 10년 이상의 비거치식 분할상환 방식’이라는 점에 빗대어 당국의 이번 조치가 가계대출 문제를 10년 뒤로 미루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영식 연구원은 “향후 10년간 소득증가율을 고려한 금융위의 조치는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결국 가계부채(상환) 문제를 해당 기간만큼 뒤로 미루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도 “이번 조치로 당연히 가계부채는 늘어나게 된다”면서 “그러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소득이 늘어나야 할 사람들이 결국은 빚만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