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숨지기 전 일주일 98시간 배송… 툭 하면 욕설·독촉에 시달렸다

[단독] 숨지기 전 일주일 98시간 배송… 툭 하면 욕설·독촉에 시달렸다

입력 2020-11-23 22:22
수정 2020-11-24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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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노동자들 ‘과로사’의 이유

배송물 파손 이유로 고객과 잇단 말다툼
흉통 호소하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져
질병판정위 “만성과로·스트레스받은 듯”


택배업무, 육체노동에 감정노동까지 겹쳐
46% 언어폭력 경험… 가해자 87%가 고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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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정치공동체 청년하다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중구 소공로 한진빌딩 앞에서 ‘과로사 택배 노동자 추모 대학생 집회’를 열고 택배 노동자 처우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24 뉴스1
2030정치공동체 청년하다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중구 소공로 한진빌딩 앞에서 ‘과로사 택배 노동자 추모 대학생 집회’를 열고 택배 노동자 처우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24 뉴스1
택배 노동자 박준호(사망 당시 44세·가명)씨는 2019년 4월 25일 오전 고객과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배송 도중 물건이 파손됐다는 민원을 상대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박씨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소화가 안 된다며 식사를 잘 하지 못했지만 다툼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박씨는 속이 불편해 26일 내과와 한의원에서 잇달아 진료를 받았다. 다음날인 27일에는 병원 진료 때문에 배송하지 못한 물품을 배우자와 함께 날랐다. 28일 오전 5시 30분 박씨는 자택에서 심한 흉통을 호소했다. 가족이 119에 신고해 박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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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뒤인 2019년 12월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는 “박씨의 발병 전 1주간 업무 시간이 약 79시간 30분으로 평균 하루 250개의 택배상자를 배송했다”며 “종합적으로 볼 때 고인은 사망 전까지 업무를 수행하면서 만성적 과로와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판정했다. 2015년부터 올해 8월까지 지난 6년간 과로사로 인정받은 택배 노동자는 총 9명(산업재해 신청 11명·불승인 2명)이다. 서울신문이 23일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비례)로부터 확보한 이들의 업무상 질병판정서에는 살인적인 업무량이 무덤덤하게 기록돼 있다. 배송 도중 쓰러져 사망한 노동자만 5명이었다. 사망하기 전 1주일간 배달시간이 100시간에 가까운 노동자도 있었다.

숨진 택배 노동자들은 고객 민원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택배 업무가 육체노동을 넘어 감정노동이 돼 버린 것이다. 우체국 배송 위탁업무를 하다 2017년 1월 31일 사망한 김상호(당시 53세·가명)씨는 재해 1주 전 업무시간이 98.4시간에 달했다. 김씨는 사망하기 5일 전인 설 연휴 전날부터 가슴이 조이는 느낌이 들고 식은땀이 났다. 설날 특별 배송기간(11일) 휴무일과 휴식시간 없이 일한 영향이 컸다. 배송 물량이 몰린 탓도 있었지만, 명절 선물 중 고가의 신선 제품이 많은 이유도 있었다. 파손·부패·배송 지연이 되면 김씨가 배상해야 하기에 정신적 부담이 어느 때보다 컸다. 김씨는 명절 연휴에 쉬고 5일 뒤 출근해 평소처럼 일했지만, 경기 파주의 한 아파트에서 쓰러졌다. 지병이 없고 건강한 편에 속했던 김씨의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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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질병 판정서
업무상 질병 판정서
판정위는 “김씨의 발병 전 12주간 주당 평균 업무시간은 57시간 54분으로 최근 업무량이 30% 이상 증가했다”며 “1주간 배달량은 1000건 이상으로 신선식품의 부패 등 배송 지연 등에 따른 육체·정신적 스트레스가 다른 때보다 높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과로사로 숨진 택배노동자 9명 중 8명의 판정서에는 고객 민원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지난 1월 13일 협심증(추정)으로 숨진 이정진(당시 33세·가명)씨도 그렇다. 이씨는 자택에서 쓰러지기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 9일 휴일이었음에도 고객 민원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해당 민원인의 집을 찾아갔다. 김씨는 지난해 5월 24일 택배 일을 시작한 이후 약 7개월간 총 31건의 민원을 받았다. 한 달에 4건꼴로 민원이 발생한 셈이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지난 9월 택배 노동자 82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에서도 고객 클레임(이의제기)에 따른 정신적 압박이 드러난다. 언어폭력을 당한 택배 노동자는 346명(46.2%)이었는데, 이들은 가해자로 고객(87.3%)을 가장 많이 꼽았다. 배송을 빨리해 달라는 독촉 역시 431명(58.3%)이 경험했다. 가해자는 고객이 45.4%로 가장 많았고, 대리점(31.6%), 원청(23.0%) 순이었다.

김태완 전국택배연대노조위원장은 “분실·파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회사가 택배기사에게 뒤집어씌울 게 아니라 회사가 우선 책임지고, 추후 누구 책임인지 입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택배기사들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다”며 “택배기사들은 배송 현장에서 고객을 만나면서 보람을 많이 느끼고 응원에 감사하게 여긴다. 무책임하게 배송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혹시 배송이 조금 늦더라도 따뜻한 격려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년간 업무상 질병 산재 승인을 받지 못한 택배 노동자 사례는 2015년 2건이었다. 이들의 재해 4주 전 주당 업무시간은 각각 27시간 41분, 52시간이다. 12주 전은 29시간 51분, 52시간이었다. 판정위는 단기·만성 과로 기준인 발병 4주 및 12주 전 주당 평균 근무시간이 각각 64시간, 60시간을 초과하지 않아 객관적으로 업무상 과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2020-11-24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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