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후 100일 글로 전한 유새빛씨
직장인 유새빛(28·필명)씨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의혹 사건을 보면서 신입사원 시절을 떠올렸다. 2017년 여름 유씨는 고민 끝에 상사의 성희롱을 신고했다. 그는 ‘미투’ 이후 100일의 이야기를 이달 초 ‘우리에게는 참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이름의 책으로 엮어 냈다.
유씨는 23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전 시장 사건을 둘러싼 2차 가해와 서울시의 미진한 대응을 보며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이 위축될까 우려된다”면서 “‘당신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유씨는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제도는 갖춰졌지만, 제도를 작동시켜야 하는 책임자의 인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서 “대부분 성희롱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로 사건이 축소되고 덮이길 바란다”고 짚었다.
●이동한 부서, 과거 언급 안 해 고마워
유씨의 직장은 ‘여성 친화적’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대기업이다. 그렇지만 상사들은 회식 자리에서 유씨의 손을 잡고 허벅지를 만졌다. 정식 부서 배치 후 첫 회식 자리에서 최모 차장은 유씨에게 “우리 회사의 꽃이에요. 이런 걸로 미투하지 마시고요”라면서 허리를 만지고 어깨동무를 했다.
유씨는 악행의 고리를 끊고 싶어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신고했다.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동료들은 사건 무마를 시도하고 피해자인 유씨를 향해 험담을 쏟아냈다. 그는 “동료들이 위로하다가도 ‘평소에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절차대로 하면 누가 다칠지 생각하라’고 압박했다”면서 “최악은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지 왜 유난을 떠느냐’고 비꼬는 동기였다. 딸이 있는 50대 상사는 ‘성희롱 가해자라고 해도 정직 1개월 징계는 심한 게 아니냐’고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성희롱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하거나 회유하는 일은 직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전직 비서 A씨도 4년간 20여명의 상급자에게 성 고충을 토로했지만 묵살당했고, 고소 사실이 알려진 뒤 서울시 직원들에게 회유와 압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유씨가 고통스러운 나날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동료들 덕분이었다. 특히 성희롱 행위자인 최 차장의 회유 요청을 거절하고 ‘방패’가 되어 준 여성 차장이 큰 힘이 됐다. 그는 “피해자의 지인들이 위로한다면서 섣불리 사실관계를 추측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새로 이동한 부서가 저를 환영하고 과거의 일을 언급하지 않아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법적 권리 행사할 수 있는 환경 필요
유씨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자가 유급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도 노동법을 공부하며 뒤늦게 알았다”며 “사내 담당자의 조력이 부족하면 사외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녹음 등 증거물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성희롱 신고를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유씨는 망설임 없이 “다시 돌아가도 신고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의 권리”라고 덧붙였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2020-07-24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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