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원·상담사 등 ‘노인친화 일자리’ 기대감…“청년 일자리 축소” 반론도전문가들 “파견 확대 필요하지만, 일자리 질 높여야”
3월 임시국회가 열리면서 정부와 여당은 노동개혁 법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 다시 열을 올리고 있다.노동개혁 4대 법안 중 가장 논란이 뜨거운 것은 파견법이다. 정부와 여당은 파견 확대가 중장년 일자리를 늘린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해 수십만 명씩 쏟아져 나오는 베이비부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 파견 확대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아직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파견 일자리의 질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정부 “베이비부머 은퇴자, 파견 확대가 일자리 해결책”
현행 ‘파견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은 32개 업종, 197개 직종에만 파견을 허용한다. 파견이 허용되는 업종은 컴퓨터·경영·재정·특허·영화·연극·방송 분야 전문가, 사무지원·음식조리·건물청소·배달·운반 종사자, 번역·통역가, 창작·공연예술가, 전기공학·통신 기술공 등이다.
당정이 내놓은 파견법이 통과되면 금형·주조·용접·소성가공·표면처리·열처리 등 ‘뿌리산업’ 제조업에 파견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베이버부머 은퇴자의 취업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출산율이 매우 높았던 시기에 태어난 세대다. 그 규모가 우리나라 총인구의 14%인 68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50대 중후반으로, 첫 직장에서 막 은퇴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있다.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를 보면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은 대부분 임시·일용직(44.3%)이나 생계형 자영업(26.1%)으로 내몰리고 있다. 직장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쌓은 유·무형의 지식과 경험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파견 허용 업무가 확대되면 이들의 능력과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다고 정부는 강조한다.
은퇴자들이 일할 수 있는 대표적인 ‘노인친화형 일자리’로는 안내·접수사무원, 사회복지사, 상담전문가, 청소년지도사, 상점판매원, 매표원, 검표원, 주차단속원, 웨이터, 재단사, 재봉사, 도시·교통설계전문가, 전기·전자공학 기술자·연구원 등을 정부는 꼽았다.
현재 파견이 허용되지 않는 이들 업무가 55세 이상 고령자에게 개방되면 재취업과 경력 활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제조업 분야 은퇴자의 경우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심한 뿌리산업 분야에 파견돼 숙련기술자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안산·반월공단 등 구인난이 심한 수도권 공단에서는 파견이 금지된 제조업 분야의 불법 파견이 성행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김모(54)씨는 “연봉 액수보다는 연륜과 경험을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며 “파견을 확대하면 기업 입장에서도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기 쉽고, 근로자 입장에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어 큰 시너지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권 고용부 장관은 “파견법은 680만명 이상의 베이비부머가 본격적으로 은퇴하게 되는 우리 현실에서, 이들에게 좀 더 안정된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절박한 대안”이라며 파견법 개정안 등 국회의 노동개혁 법안 처리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전문가들 “파견 확대하되, 임금·복지수준 높여야”
노동계는 파견 확대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정부가 말하는 안내원, 사회복지사, 상담전문가 등이 노인 친화형 일자리라고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 기존 일자리를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자리 총량’이 늘어나지 않는 한 젊은층 일자리를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청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중장년 일자리 문제가 노동정책의 우선순위에 오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고용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50대 취업자는 14만9천명, 60세 이상은 17만2천명 늘었으나, 15∼29세 청년층 취업자는 6만8천명 증가하는데 그쳤다. 30대 취업자는 오히려 3만8천명 줄었다. 지난해 고용시장을 중장년층이 주도했다는 얘기다.
한국노총 강훈중 대변인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파견근로 확대가 무슨 일자리 정책이냐”며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 한 고령자 파견 확대는 젊은층 일자리 감소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고령자 파견을 확대하되, 파견 일자리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파견규제 완화 추세는 세계적인 흐름이며, 우리나라도 이 흐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며 “파견규제 완화가 중장년층의 일자리 찾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므로, 55세 이상 고령자의 파견 확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43개국의 파견근로 규제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파견이 전면 금지된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를 제외하고 관련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로 조사됐다. 고용시장이 양호한 OECD 국가는 대부분 파견 규제가 없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파견 일자리의 임금과 복지 수준이 매우 낮으므로 이를 끌어올리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파견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월 169만원으로 청소, 경비 등 용역 근로자(149만원)보다 높다. 하지만 파견 근로에는 임금 수준이 높은 전문직 파견도 포함돼 있다. 이를 감안하면 파견 근로자의 임금은 ‘저임금’을 대표하는 용역 근로자보다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일부 영세기업에서는 파견 근로자의 4대 보험 가입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아, 파견 근로자의 국민연금 미가입률은 50%에 육박한다. 복지수준이 매우 낮다는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은 “파견근로의 질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파견을 확대해도 노동개혁의 주요 목표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해소’는 달성할 수 없다”며 “파견 일자리의 질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파견 규제가 거의 없지만, 임금과 복지 수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또한 없는 유럽 국가들처럼 근로자 간 격차 해소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는 얘기다.
조준모 교수는 “중장년층 일자리 마련 등을 위해 파견 확대가 필요하지만, 현 상황에서 파견을 확대하면 질 낮은 일자리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일면 타당하다”며 “파견을 확대하되, 파견 근로자의 임금, 복지수준 향상도 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