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의열단 활동을 지원한 김대지 선생을 4월의 독립운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05년 밀양지역 반일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펼쳤다.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를 조직해 밀양지역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하고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되기도 했다. 출옥 후 만주로 이주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했다.
또 중국 동삼성, 북경, 길림, 상해를 왕래하며 비밀결사조직 구성원, 연락기지, 무기, 자금 등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해 11월 의열단 탄생을 보게 됐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의열단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1929년까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통합운동에 전념한 선생은 김동삼이 밀정에 의해 체포되고 김좌진 마저 피살되면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그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선생은 1942년 이역만리 만주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뉴시스
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05년 밀양지역 반일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펼쳤다.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를 조직해 밀양지역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하고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되기도 했다. 출옥 후 만주로 이주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했다.
또 중국 동삼성, 북경, 길림, 상해를 왕래하며 비밀결사조직 구성원, 연락기지, 무기, 자금 등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해 11월 의열단 탄생을 보게 됐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의열단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1929년까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통합운동에 전념한 선생은 김동삼이 밀정에 의해 체포되고 김좌진 마저 피살되면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그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선생은 1942년 이역만리 만주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뉴시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