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는 어땠길래

2007년에는 어땠길래

입력 2012-06-15 00:00
수정 2012-06-1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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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선거인단 수·경선시기 절충안 합의 막판 여론조사 반영비율·질문방식 ‘치열’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非朴)계 대선 주자 간 경선 규칙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2007년 당시 경선 규칙 공방이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에도 후보들 간 경선 규칙 공방은 치열했지만 지금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현재의 한나라당 당헌·당규에 명시돼 있는 경선 규칙은 홍준표 전 대표의 작품이다. 2005년 홍 전 대표는 대의원 20%, 일반당원 30%, 일반국민 30%, 여론조사 20%를 반영하는 대선 후보 경선 규칙을 만들었다. 일반당원 의사를 50%, 민심을 50% 반영하자는 취지였다.

친박계 의원들은 2007년 경선 규칙 협상에서는 “규칙 자체에 손대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007년 2월부터 시작된 경선 규칙 협상에서 쟁점은 선거인단 수와 경선 시기였다. 당시 한나라당 당헌에는 선거인단은 4만명으로 하고 경선 시기는 6월 22일로 정해져 있었다. 이 시기를 놓고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후보 간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결국 타협안은 선거인단 23만명, 경선 시기 8월 20일로 결정됐다. 큰 얼개를 바꾼 것은 아니지만 세부사항을 놓고 충돌이 있었고 절충안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손 후보는 탈당했다.

그해 5월에는 당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 간에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놓고 충돌이 있었다. 박 후보 측은 선거인단의 실제 투표율이 50%일 경우 4만명의 절반인 2만명분만 반영하기로 한 원칙을 강조했고 이 후보 측은 여론조사 전체 결과를 반영하자며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박 후보의 주장이 관철됐다. 하지만 이 후보 측은 ‘선호도’를, 박 후보 측은 ‘지지도’를 고집하는 등 여론조사 방식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2000표가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2000표 전쟁’이란 말도 나왔다.

결국 박 후보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432표를 이기고도 여론조사에서 2884표를 져 1.5% 포인트 차인 2452표 차로 패배했다. 한 친박계 의원은 “박근혜 후보가 경선 규칙 협상과 선거인단 규모 등에서 양보해서 졌지만 이후 경선 규칙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재오 의원 등 비박계 측은 “당시 강재섭 대표는 9개월여간 50여회 미팅과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며 양쪽 후보를 조율하는 등 성의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2012-06-1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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