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재판 가서 지면 위상 추락”… 국익 앞에 국민 저버린 법원

“국제재판 가서 지면 위상 추락”… 국익 앞에 국민 저버린 법원

민나리 기자
민나리 기자
입력 2021-06-07 18:10
수정 2021-06-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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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손배소’ 판례 엎고 1심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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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왼쪽)씨와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소송단 대표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항소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날 법원은 강제징용 피해 유족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피해자들은 “한국 판사와 한국 법원이 맞느냐”며 법원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뉴스1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왼쪽)씨와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소송단 대표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항소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날 법원은 강제징용 피해 유족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피해자들은 “한국 판사와 한국 법원이 맞느냐”며 법원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뉴스1
2018년 대법 “日기업 반인도적 불법행위
협정으로 위자료 청구권 소멸 안 돼” 판시


재판부, 국제 논리에 ‘식민지 시혜론’ 덧대
“협정으로 받은 3억弗, 경제 성장 큰 기여
국제재판 대상 되는 것 자체로 신뢰 손상”
피해자 대표 “국민 버린 국가, 필요 없다”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해 분노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사단법인 일제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대표인 장덕환씨가 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일본 강제징용 소송을 대표해 진행하고 있는 장씨는 “(재판부가) 사전 연락도 없이 재판 기일을 (오는 10일에서) 오늘로 당겨서 하는 바람에 지방에 사는 원고들이 오지도 못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같은 법원 민사합의34부(부장 김양호)는 송모씨를 비롯한 85명의 원고가 16곳의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실상 원고 패소를 의미한다.

불과 2년 8개월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판결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놨었다. 당시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하는 위자료 청구권”으로 판단했다. 이에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보고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날 재판부는 “비엔나협약 27조에 따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한일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 없고, 대한민국은 국제법적으로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하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 판결이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의 약소국 병합이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면서 “국제법을 제국주의 침략법이라고 주장한 소련마저도 동유럽 약소국을 강점한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청구권협정에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원고 측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리도 끌어들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을 일제강점기로부터 찾는 ‘식민지 시혜론’이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으로 체결된 3억 달러가 과소하다는 (원고 측) 주장은 현재의 잣대”라며 “이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보다 국가와 국익에 더 무게를 싣는 모습도 보였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재판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법신뢰에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라면서 “패소할 경우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위안부 문제 등도 패소 우려를 들어 국제재판에 가면 안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판결이 서울중앙지법과 광주지법 등에 남아 있는 20여개의 일본 전범기업 상대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당초 대법원 판결에 따라 잇따라 승소 판결이 내려질 것으로 전망했으나 이날 정반대의 판결이 나오면서 각 재판부의 고심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남근 변호사(법무법인 위민)는 “법관들의 법리 각축장이 되지 않으려면 남은 강제징용 관련 사건에 대한 판단도 이번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2021-06-08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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