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영 멜버른대 교수, 외교전문지에 기고문
호주 귀화기록·지역신문·병원기록 통해 추적
1876년 당시 17살에 무역선 타고 호주 도착
밀두라 니콜스 포인트 묘지에 있는 존 코리아의 묘지와 그의 귀화 증명서. 송지영 교수 제공
멜버른대 한국학연구허브 소장인 송지영(현지명 제이 송) 한국학 교수는 최근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19세기의 양털깎이가 우리에게 한국과 호주 관계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호주에 이민한 최초의 한국인은 1876년 도착한 존 코리아”라고 주장했다.
1876년 중국 상하이와 호주를 오가며 차를 나르던 무역선 로치엘을 타고 호주에 도착한 17살 소년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1894년 작성된 호주 정부의 귀화 자료에는 그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존 코리아로 지은 것으로 나온다.
1876년에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35세의 한국 출신자(native of Corea)로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 골골(Gol Gol)에서 양털깎이로 일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존 코리아의 귀화증명서. 송지영 교수 제공
존 코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NSW주 브로큰힐에서 다시 광산면허를 신청했고, 1903년 면허를 취득했다.
송 교수는 “그는 광산으로 꽤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1902년 지역신문의 한 기사를 근거로 들었다. ‘배리어 마이너스’(Barrier Miners)는 존 코리아가 동료들과 축구 경기를 관람하다 150파운드 상당의 수표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다는 기사를 실었다.
존 코리아가 수표를 잃어버렸다는 내용의 지역신문 기사. 송지영 교수 제공
존 코리아는 1924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의 장례식은 1924년 8월 6일 지역신문에 부고를 실은 지인들에 의해 치러졌다.
그의 유산은 니켈로 만든 손목시계와 전쟁채권을 포함한 425파운드가량의 저축이었다.
존 코리아는 밀두라의 니콜스 포인트 묘지에 안장됐다. 송 교수가 그의 묘지를 확인한 결과 묘비 없이 묘소만 남아 있었다.
송 교수는 “존 코리아의 이야기는 한국과 호주의 관계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음을 보여준다”면서 “지난 150여년간 크고 작은 한인 이주의 물결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송 교수는 존 코리아의 사례를 통해 호주의 기술 인력난의 해법을 모색하고 제시했다.
그는 “한국의 남아도는 젊은 기술 인력이 호주 기술 인력난의 해법이 될 수 있다”면서 “양국 정부가 기술 이민지와 가족들에게 국경의 문턱을 낮춘다면 양국 정부와 이민자들이 혜택을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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