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피해 예상국 이집트 IS 테러설 부상 경계, 러시아도 신중, 서방은 IS 격퇴전 지지 확보에 유리…IS는 공포심 극대화 전략
이집트 시나이반도 북부에서 지난달 말 발생한 러시아 여객기 추락사고의 원인을 두고 기체 결함설과 테러설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여러 가설을 둘러싼 관련국들의 정치적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옛 소련을 포함해 러시아 항공 운항 사상 최대 참사로 기록된 이번 사고의 원인이 무엇으로 밝혀지느냐에 따라 해당국이나 관련 단체가 받을 충격과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가설에 대한 관련국 및 조직들의 반응과 홍보전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상황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사고 후 일주일이 가까워지지만, 아직 여객기 추락 원인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선 엔진 고장이나 꼬리 부분 파손 등 기체 결함설과 기내로 반입한 폭발물을 이용한 극단주의 무슬림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자폭테러설 등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IS 이집트 지부가 추락 사고 직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제기됐던 테러설은 테러 조직이 그럴만한 기술이나 무기를 보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한동안 수그러들었으나 영국과 미국 정부 관리들이 4일 일제히 폭탄 폭발로 여객기가 추락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다시 부상했다.
영국 총리실은 성명을 통해 “더 많은 정보가 드러나면서 여객기가 폭발장치에 의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게 됐다”고 밝혔고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도 “기내에 있던 폭발장치가 폭발을 야기했을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테러설에 무게를 실어준 영국 측의 이같은 발표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이날 소집한 비상정부위원회(COBRA) 회의 뒤 나왔다. 영국 관리들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대 상황에서만 소집하는 COBRA 회의에서 러시아 여객기 격추 사건을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뒤이어 미국 CNN 방송도 자국 정부 관리를 인용해 “정보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IS나 연계 세력이 사고 여객기에 폭탄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AP 통신은 익명의 미국 관리를 인용해 이같은 가설이 IS 세력 간 통화 감청 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전했다. 테러설을 믿을 만한 중요한 단서가 포착됐다는 의미다.
앞서 미 국방부 관계자는 미 군사위성이 여객기 사고 당시 시나이 반도 상공에서 열 방사를 포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집트 외무장관 사메 슈크리는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의 발표를 시기상조라고 비판했다.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도 앞서 3일 “폭발물이나 미사일이 여객기 추락을 초래했다는 주장들은 근거없는 추정일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러시아 당국은 기내 폭발물 흔적을 조사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테러 결론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 공보비서(공보수석)는 여객기 내부 폭발설을 ‘투기성 추측’이라고 지적했고 외무부 관계자도 “러시아는 조사 결과를 기다릴 것이며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그동안 국제조사단의 공식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이런저런 가설들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공정하고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블랙박스 해독이나 시신 및 기체 잔해 분석 등의 공식 조사가 끝나야 명확한 사고 원인이 드러날 것이란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사고 이후 제기된 갖가지 가설에는 관련국이나 단체들의 복잡한 정치적 셈법이 숨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테러설을 줄곧 부정하는 이집트는 IS의 테러에 의한 여객기 격추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국가다. 항공기 안전 운항을 위한 보안점검과 예방 조치를 소홀히 했다는 국제적 비난을 사는 것은 물론 최대 수입원인 관광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벌써 이집트 공항들의 보안 점검이 허술해 테러리스트들이 보안 요원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폭발물을 기내로 반입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집트 국내총생산(GDP)에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1%로 가장 큰 외화 수입원이다. 매년 영국 100만 명, 러시아 300만 명 등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샤름 알셰이크, 후르가다 등 홍해 연안의 이집트 휴양지들을 찾고 있다.
테러 공포로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이집트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이미 아랍에미리트(UAE)의 에미레이트항공, 프랑스 항공사 에어프랑스,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 영국 및 네덜란드 항공사 등이 모두 샤름엘셰이크 운항을 중단했다. 러시아 관광객들도 이집트 휴양지로의 여행 예약을 줄줄이 취소하고 있다. 이집트 정부가 어떻게든 테러설을 잠재우려 애쓰는 이유다.
이번 사고로 220명에 가까운 자국인을 잃은 러시아도 테러설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여객기 사고가 IS의 소행으로 확인될 경우 러시아도 적잖은 정치·외교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30일부터 시리아 내 IS 거점 등을 상대로 공습작전을 시작한 러시아가 작전 개시 한 달 만에 IS가 공언해온 ‘십자군’ 대상 테러의 첫 번째 표적이 된 것으로 판명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가 러시아의 시리아 사태 개입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반면 IS 격퇴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동맹국들은 여객기 사고를 대(對)IS 전쟁 강화의 또 다른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 IS가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주요 테러 조직임을 부각시키면서 IS 격퇴전에 더 많은 동맹국과 지지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러 주체로 지목되는 IS도 정치적으론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다. 사고 직후 이집트 지부가 여객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한 IS는 4일 다시 한 대원이 트위터에 올린 육성 녹음을 통해 “우리가 여객기를 추락시켰다”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시점에 구체적인 격추 방법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테러를 자처하면서도 구체적 방법에 대해선 함구함으로써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실제로 이번 여객기 격추가 IS의 소행으로 밝혀지면 이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 추종 세력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적’들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증명돼 세 과시와 지지 세력 추가 확보라는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고 여객기가 소속된 러시아 항공사도 추락 원인이 기체 결함으로 굳어지는 것을 우려해 테러 등의 ‘외부 영향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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