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뮌헨회담과 한반도/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뮌헨회담과 한반도/김성곤 논설위원

김성곤 기자
입력 2018-03-11 17:38
수정 2018-03-1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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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을 것이다. 대영제국 또한 1938년에 파멸했을 것이다. 나는 결코 역사가의 평가가 두렵지 않다.” 독일의 히틀러와 굴욕적인 협약을 맺어 2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40년 11월 9일 죽기 전 작성한 유언장의 한 토막이다.
체임벌린은 지금도 비난을 받는다. 1997년 BBC의 영국 국민 여론조사에서 체임벌린은 ‘20세기 최악의 총리’로 꼽혔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을 앞두고 1930년대 영국의 유화책을 예로 들며 국민의 동의를 구했고, 베트남전 때 린든 존슨 대통령이나, 걸프전쟁 때 조지 H W 부시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뮌헨을 예로 들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연일 체임벌린의 뮌헨회담을 빗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홍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핵 폐기의 구체적인 실증이 없는 위장 평화회담은 대한민국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며 “뮌헨회담에서 히틀러에 속아 2차대전의 참화를 초래했던 체임벌린도 회담 직후 영국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고 말했다. 맞다. 체임벌린이 뮌헨회담을 마치고 돌아올 때 영국 국민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를 나라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날 체코 슈데텐 지역을 침공한다.

체임벌린에 대한 다른 평가도 적지 않다. 만약 그때 영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면 나라를 지켜 낼 수 있었을까. 그때는 미국도 유럽의 전쟁에 참가할 뜻이 없을 때다. 영국은 히틀러의 위험을 감지하고, 뮌헨회담 이전부터 국방력 강화에 나섰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1년 뒤인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체임벌린은 선전포고만 하고 군대는 보내지 않는다. 본격적인 전투는 1940년 들어서 벌어진다. 그 2~3년 사이에 영국의 국방력은 강화됐고, 이를 바탕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히틀러조차 영국 침략은 1938년이 적기였다고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북핵과 관련, 남북은 물론 북ㆍ미 정상회담이 오는 4, 5월 연이어 열린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군사적 옵션을 들먹이면서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고조됐던 게 바로 엊그제다. 잘하면 북핵 해결과 통일의 단초도 마련할 호기일 수도 있다. 역사는 원하는 대로 보이고, 원하는 대로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양대 정상회담을 체임벌린에 빗대 남북 평화 사기극으로 치부하기엔 이른 시점이 아닌가 싶다. 회담에는 기회와 시간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kr
2018-03-12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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