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인생능력시험/김재원 KBS 아나운서

[문화마당] 인생능력시험/김재원 KBS 아나운서

입력 2014-11-13 00:00
수정 2014-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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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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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변함없이 수능 한파가 마음을 더 초조하게 한다. 며칠 전부터 고 3 아들은 긴장한 낯빛이 역력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 나이에는 마치 시험 하나로 미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느낌일 테니 말이다. 부모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괜한 스트레스 받을까봐 말을 아끼고 있다. 이래저래 눈치를 봐 온 시간들이 내일 시험이면 끝난다 싶어 다행이면서도 아들아이의 파리한 얼굴을 보니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 아이는 벌써 수시라는 제도 속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마신 터라 기운이 더 없다. 예전에는 한두 번의 실패와 좌절로 끝나던 것을 요즘은 수시 여섯 번에 정시 세 번을 더해 아홉 번이나 떨어질 수 있으니 그 아픔과 고통은 더 크고도 남을 것이다. 실패가 약이라면 약을 한 번에 많이 먹는 것인데, 이런 입시 제도를 좋다고 해야 하는지 탓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1985년 11월의 추운 날, 일원동에 살던 나는 효창동으로 시험을 보러 가야 했다. 아픈 홀아버지는 이른 새벽 택시를 불러 주셨다. 아버지가 정성껏 싼 계란말이가 담긴 도시락은 심리적으로 꽤 무거웠다. 나는 그날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실패라는 단어를 부둥켜안고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씨름했다. 따지고 보면 그건 실패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의 웃음도 결코 성공이 아니었다. 그 후 30년. 내 인생에는 수많은 인생능력시험이 있었다. 단지 대학 입시는 앞으로 치르게 될 인생능력시험의 전초전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지금쯤 수험생들은 시간을 돈 주고라도 사고 싶은 심정일 게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 ‘생존 시간 카드’에서는 시간을 살 수 있다. 소설 속 가상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시간을 배급받지만, 자기 시간을 돈을 받고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 팔 수 있다. 부자들은 시간이 돈이기에 돈을 주고 시간을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돈을 받고 시간을 파는 것이 이익이다. 부자들에게는 1월 33일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3월 25일에 잠들어서 4월 1일에 깨어난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진다. 어쩌면 현실에서도 우리는 시간을 거래하고 있다. 단지 돈이 아니라 노력, 절제, 부지런함이라는 덕목으로 시간을 아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 다음에 있을 인생능력시험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더 많은 시간을 사 보자. 수능 시험 날 가장 힘든 사람들은 같은 나이에 있으면서도 시험을 보지 못하는 청소년들일 것이다. 사람들이 온통 시험에 관심을 갖는 그날에 혹여 자신만 뒤처지는 느낌을 갖게 될까봐 걱정이다. 일찍이 요리, 제빵, 자동차 정비, 미용 등의 분야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진로를 정한 친구들이 수능을 보지 않는 것을 인생의 실패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일찍이 마음을 정한 그들이 세상을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꿈을 접은 친구들도 인생이 접힌 것이 아님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물론 당연히 힘들고 어려운 길이 펼쳐지겠지만 주변 어른들도 이런 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어른들의 응원이 이들의 아쉬운 마음에 가장 큰 약이 될 것이다. 인생이 100m 달리기라면 수능 시험을 보는 청소년들은 19m를 지나고 있다. 달리는 사람들은 누가 앞서고 누가 뒤에 있는지 알겠지만 관중석에서 보면 19m 부근에 있는 선수들은 거의 일직선이다. 거기서 거기란 얘기다. 선수들은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인생능력시험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이 있으니까.
2014-11-1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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