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유류세인데 화살을 정유업계에 돌려” 볼멘소리
정부가 국제유가 하락에 따라 석유류 제품 가격인하를 추진하고 나서자 최악의 실적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정유 및 석유화학업계가 들끓고 있다.이미 국제유가 하락분을 반영해 국내 가격도 충분히 내렸는데도 정부가 또다시 가격인하를 강압하려 한다는 것이다.
9일 정유업계와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작년말을 기준으로 환율을 감안한 국제 휘발유 가격은 ℓ당 455.2원으로 연초(1월 첫째주)보다 327.5원 감소한 반면 정유사의 세전 휘발유가격은 877.1원에서 541.4원으로 335.8원이나 감소했다.
국제유가의 내림폭보다 국내 휘발유값 하락폭이 더 크다는 얘기다.
하지만 유가의 절반을 차지하는 유류세로 인해 주유소 판매가는 작년 1월 셋째주 1천887.6원에서 12월 다섯째주 1천594.9원으로 292.7원밖에 내리지 않았다. 유가하락을 일반인이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유가에 고정 세율을 적용하기 때문에 휘발유 판매가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월 49%에서 12월 말 56%까지 치솟았다.
유가가 고점을 찍을 때와 비교를 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가장 높았던 7월초와 유가가 급락세였던 작년말을 비교하면 국제 휘발유가격은 337.3원 내렸지만 국내 휘발유 세전가격은 이보다 6원 많은 343.3원이 내렸다. 경유 인하폭 역시 국내 가격(268.5원)이 국제가격(264.4원)보다 3.1원 많다.
세후 주유소 판매가의 경우 이때와 비교하면 6개월새 휘발유는 262.0원, 경유는 254.3원밖에 내리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유류세 인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석유·화학제품의 가격에는 유가 하락분이 반영돼야 한다고 보고 이들 제품의 가격 인하 유도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한 정유사 간부는 “문제는 유류세인데도 정부가 엉뚱한 곳을 가리키며 대중영합적 정책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마치 2011년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으로 시작된 ‘정유업계 때리기’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정제마진 감소로 실적악화에 시달리다 유가하락에 따른 대규모 재고손실로 가뜩이나 어려운 위기상황인데 여기에 정부가 지원은커녕 유가하락 체감 차원에서 판매가 인하를 추진하자 폭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9일 유가 하락에 따른 국내 석유·LPG제품 가격 인하 방안을 논의하고 애로사항을 듣기 위해 업계 대표들을 소집해 놓은 상태다.
업계는 정부 시책에 맞서는 모양새로 비치는 것에 대해 꺼리면서도 최근의 정부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며 반박하기도 했다.
특히 국제유가 하락의 효과가 하위 석유화학 및 공산품 시장으로 전이될지 여부에 대해 업계 전문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 경제의 원유 의존도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유가가 제품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갈수록 작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국내 에너지원별 소비량 추이를 보면 1차 에너지원 중 석유제품 비중은 2011년 40% 이하로 떨어진 상태다.
신한경제연구소는 에너지원 다각화, 연비향상 등으로 인해 한국의 원유도입 물량이 2000년 8.8억 배럴에서 2013년 9억 배럴로 소폭 늘어나는데 그쳤다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원료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특히 저유가 속에서도 국내 석유제품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데 대해서도 정유업계는 경기부진의 영향이 더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유가하락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유가하락이 본격화된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석유제품 수요는 3억4천469만 배럴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1% 감소했다. 11월엔 육상 수송용 석유제품 소비가 전년보다 3.2% 줄어들기도 했다.
건설, 철강, 제지, 식료품 등 대다수 업종에서 석유제품 수요가 감소한 것 역시 수요 부진으로 공장 가동률을 줄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유가하락 분이 반영되지 않은 사례로 관심을 끌었던 화학섬유 원료의 아웃도어 업계에서도 할말이 있다.
A사 관계자는 “아웃도어 시장은 석유화학 3차 시장이 아니라 피복을 구매하는 실 소비자들의 트렌드가 반영된 패션 시장”이라며 “소가죽 값의 등락에 따라 루이뷔통 백의 가격을 움직일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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