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은퇴] 고생했어… 이젠 쉬렴

[박지성 은퇴] 고생했어… 이젠 쉬렴

입력 2014-05-15 00:00
수정 2014-06-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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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캡틴’ 박지성 25년 만에 축구화 벗기로… 작은 몸집·평발의 역전인생 마지막 한마디는 “후회없다”

‘두 개의 심장’이 25년간 정든 축구화를 벗는다.

박지성(33)이 14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박지성축구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 무릎 상태가 다음 시즌을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해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어 “‘나도 은퇴할 때 눈물이 날까’ 생각했지만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그만큼 축구 선수로서 미련이 남는 게 없다”고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또 김민지(28) 전 SBS 아나운서와는 오는 7월 27일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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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이 14일 부친 박성종(왼쪽)씨, 모친 장명자씨와 함께 경기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단상 앞에 진열된 박지성의 유니폼들이 그가 걸어온 축구 인생을 대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수원 세류초, 안용중, 수원공고, 명지대, 국가대표, 교토 퍼플상가(일본), PSV에인트호번(네덜란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스파크 레인저스(이상 잉글랜드), 에인트호번.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박지성이 14일 부친 박성종(왼쪽)씨, 모친 장명자씨와 함께 경기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단상 앞에 진열된 박지성의 유니폼들이 그가 걸어온 축구 인생을 대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수원 세류초, 안용중, 수원공고, 명지대, 국가대표, 교토 퍼플상가(일본), PSV에인트호번(네덜란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스파크 레인저스(이상 잉글랜드), 에인트호번.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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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1990년 세류초 4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뒤 안용중-수원공고-명지대-교토상가(일본)-PSV에인트호번(네덜란드)-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퀸스파크 레인저스(QPR·잉글랜드)-에인트호번(임대)으로 이어진 그의 축구 인생도 막을 내리게 됐다. 2011년 1월 국가대표에서 물러난 뒤 고질적인 무릎 통증 때문에 은퇴 시기를 저울질해 오던 그는 최근 토니 페르난데스 QPR 구단주의 내락을 받아 마음을 정했다고 전했다.

세류초 6학년 때 제5회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하며 가능성을 보이긴 했지만 수원공고를 마칠 때 어느 대학 팀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몸집도 작고 축구 선수로서 최악의 조건인 평발이었기 때문.

그러나 그의 성실함과 왕성한 활동량을 눈여겨본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의 천거로 1999년 명지대에 입학, 김희태 감독의 조련을 받으면서 급성장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치른 올림픽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발탁됐다.

이듬해 일본 J리그 교토상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박지성은 2002년 한·일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스타 반열에 올랐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이영표(37)와 함께 에인트호번에 입단,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그 뒤 2005년 세계적인 명문 클럽인 맨유에 입단, 한국인 1호 프리미어리거로 기록됐다. 한때 무릎 때문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05경기 27골을 터뜨려 한국 선수, 나아가 아시아 출신 선수들에 대한 편견을 몸소 극복해 냈다.

국가대표로서도 희생을 다했다. 2000년 4월 라오스와의 아시안컵 1차 예선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른 박지성은 일본과의 2011 아시안컵 준결승을 통해 A매치 100경기(13골)를 채웠다. 박지성이 걸어온 한 발 한 발이 1980년대 차범근 이후 한국 축구를 세계화로 이끄는 족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2014-05-15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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