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함·침착성·이름 석 자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18·세종고)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리듬체조 개인종합 예선 경기가 열린 9일(현지시간)부터 결선 5위로 대회를 마무리 한 11일까지 사흘간 손연재는 런던 웸블리 아레나에서 시종 당당한 몸짓과 침착한 대처 능력을 선보였다.
8년 전 리듬체조에 입문한 이래 오랫동안 간직해 온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고 포디엄(체조 무대) 위에서 갈고 닦은 기량을 후회 없이 펼친 손연재는 심판진뿐 아니라 리듬체조를 사랑하는 전 세계 팬에게 이름 석 자를 확실히 알리는 큰 성과를 거둬들였다.
◇당당한 아시아의 요정 = 손연재는 첫 올림픽 출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도리어 경쟁자들이 실수를 연발하는 틈을 타 점수를 벌렸고 안정적으로 10명이 겨루는 결선에 안착했다.
손연재는 곤봉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한때 위기를 맞았으나 후프, 볼, 리본에서는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데 집중했고, 마침내 결선 진출의 영광을 안았다.
손연재와 결선 진출을 다툴 것으로 점쳐진 멜리티나 스타니우타(벨라루스), 안나 알랴브예바(카자흐스탄), 율리아나 트로피모바(우즈베키스탄) 등 베테랑 선수들이 잦은 범실로 점수를 깎아 먹고 결선 진출에 실패한 것을 보면 결정적인 순간 손연재의 집중력이 빛났음을 알 수 있다.
손연재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고, 연기 후에는 깜찍한 미소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손연재가 무대에서 우아하면서도 과감한 연기 동작으로 관객을 휘어잡았다면 무대 바깥에서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며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도 즐겼다.
손연재가 예선 첫날 중간 순위 4위로 도약하자 외신은 손연재에게 큰 관심을 표명했고, 결선 진출을 확정한 뒤에는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손연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사도 눈에 띄었다.
어렸을 적부터 영어와 일어를 독학해 의사소통해 문제가 없는 손연재는 통역의 도움을 받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외신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지난해 1월부터 러시아 노보고르스크 훈련센터에서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과 훈련 중인 손연재는 러시아어도 구사한다.
국제대회에 자주 출전하면서 경기를 치르는 노하우를 터득한 손연재는 여린 소녀에서 당당하면서 대견한 숙녀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그는 훈련 캠프를 러시아로 옮긴 뒤 1년 반 동안 10차례 가까운 국제대회에 출전해 무대 ‘울렁증’을 없앴고 체력 안배 요령 등을 배워 올림픽에서도 여유 있게 자신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풀어 갔다.
◇침착함이 빚어낸 ‘맨발 투혼’ = ‘강심장’에서 우러나온 침착함은 손연재를 읽는 또 하나의 열쇳말이다.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강한 승부욕의 원천은 바로 강한 심장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이 지금의 손연재를 이끌었다.
10일 예선에서 곤봉 연기 중 오른쪽 슈즈(신발)가 벗겨지는 돌발 악재를 만난 손연재는 순간 당황했으나 맨발로 끝까지 준비한 프로그램을 마치고 포디엄에서 내려왔다.
체조 요정의 울퉁불퉁한 발가락이 처음으로 공개되자 팬들의 관심도 크게 일었다.
손연재는 “지금껏 리듬체조를 하면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던 일이 하필 올림픽에서 일어났는지 별생각이 다들었다”고 말했다.
회전할 때 발가락과 바닥 사이의 마찰을 줄여주는 슈즈가 벗겨지면서 손연재는 제대로 회전 기술을 펼칠 수 없었으나 최대한 빨리 일을 수습하는 위기관리 능력을 뽐냈다.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면 결선 진출의 영광도 없었다.
손연재는 “황당했지만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며 목표를 향해 무섭게 돌진하는 악바리 투지를 선보였다.
예선 리본에서도 준비 동작에서 리본이 잘 잡히지 않아 고전할 뻔했으나 당혹스러운 기색 없이 웃는 낯으로 담담하게 리본을 정리한 뒤 연기에 임하는 프로 정신도 발휘했다.
강심장을 소유한 손연재는 시니어 무대 데뷔 2년 만에 세계 3위와의 점수 차를 불과 0.225점으로 줄였다.
◇잊지 말자 ‘손연재’ = 리듬체조 경기장에는 최강국 러시아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 러시아 팬들이 국기를 흔들며 손연재를 응원했다.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훈련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결선이 치러진 11일에는 태극기를 들고 손연재에게 열렬히 박수를 보내는 팬도 등장했다.
리듬체조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 팬이 손연재를 기억할 만큼 올림픽을 통해 손연재는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과거 동유럽 선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이 종목에서 손연재는 특유의 깜찍하고 앙증맞은 연기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그게 걸맞은 성적을 냈다.
인지도가 곧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종목 특성상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준비하는 손연재의 어깨에는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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