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벗겠다고 한국에 시집간 내 딸… 병든 몸, 두 아이, 1억동 빚만 남았다

가난 벗겠다고 한국에 시집간 내 딸… 병든 몸, 두 아이, 1억동 빚만 남았다

이하영 기자
입력 2019-09-29 22:36
수정 2019-10-0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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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이주민 리포트] 뜨띠흐엉의 눈물

한국 남자가 ‘선택’해 22살에 결혼한 딸
폭력에 지쳐 4년 만에 베트남 돌아와
고향 정착 못하고 일자리 찾아 타지로
태생 따라 국적 다른 두 아이는 눈칫밥

한국의 결혼이주민 26만명은 애매한 존재다. 한국 남성과 결혼해 농어촌을 떠받치는 등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맡고 있지만 한쪽에선 이들을 ‘진정성 없는 혼인자’로 매도한다. 차별적 시선과 배우자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일부는 본국으로 떠났다. 2000년 이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38만명의 여성 중 9만명이 법적으로 이혼했다. 서류상 정리조차 하지 못하고 쫓기듯 떠난 이들을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베트남 껀터에서 15년 전 딸의 결혼과 이혼 과정을 지켜본 여성을 만나 잘못된 국제결혼이 한 가족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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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정부가 나서 장려한 국제결혼은 뼈아픈 후유증을 남겼다. 우리 사회의 배타적 시선과 배우자의 정서적·물리적 폭력을 견디지 못한 일부는 쫓기듯 본국으로 떠났고 한국에서 가져간 불행은 현지 가족에게까지 전이됐다. 사진은 지난달 베트남 남부 도시 껀터에서 서울신문이 만난 베트남 여성 뜨띠흐엉이 한국인과 결혼했던 딸의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껀터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1980년대부터 정부가 나서 장려한 국제결혼은 뼈아픈 후유증을 남겼다. 우리 사회의 배타적 시선과 배우자의 정서적·물리적 폭력을 견디지 못한 일부는 쫓기듯 본국으로 떠났고 한국에서 가져간 불행은 현지 가족에게까지 전이됐다. 사진은 지난달 베트남 남부 도시 껀터에서 서울신문이 만난 베트남 여성 뜨띠흐엉이 한국인과 결혼했던 딸의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껀터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엄마, 나 한국 남자랑 결혼해.”

15년 전 뜨띠흐엉(54·가명) 가족의 비극은 시작됐다. 며칠 이모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떠났던 딸이 다짜고짜 결혼식을 하겠다고 전화했다. 국제결혼 브로커가 모은 10명의 여자 가운데 ‘선택’받았다고 했다. 매매혼임을 모르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굶어도 여기서 같이 살자고 붙잡았다. 딸이 되물었다. “엄마, 우리 집에 결혼계약 위약금 낼 돈 있어?”

딸은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다. 중학교를 마친 뒤 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재학 내내 가난에 찌든 가족에 대한 괄시와 놀림에 시달렸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린 딸이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 집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한국 남자랑 결혼해야 할까 봐.” 브로커들이 마을을 다니며 “한국으로 시집가면 행복하게 잘산다”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베트남에서는 9만 8752명이 한국 결혼이주를 선택했다.

이왕 한 결혼,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22살 된 딸을 데려가는 사위는 40대였지만 아내를 사랑해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바람대로 되지 못했다. 사위의 사업은 결혼 직후 망했다. 그즈음부터 폭력이 시작됐다. 맞다가 집 계단으로 굴러떨어지기가 수차례. 경찰에 신고하자니 집에서 우는 젖먹이 아기가 마음에 걸렸다. 집안일만 하는 딸의 몸에 든 피멍을 주변에선 알 길이 없었다. 유엔인권정책센터에 따르면 베트남으로 돌아온 귀환여성의 22%는 가정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사위는 다 쓰러져 가는 장모의 집을 새로 짓는 데 1억동(약 500만원)을 보태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우선 대출을 받아 처음으로 철판을 댄 집을 지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무리한 대출금은 가족의 몫이 됐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다 갚지 못했다. 껀터 지역의 올해 월 최저임금은 371만동(약 19만원)이다.

고향으로 도망 오던 때 딸의 뱃속엔 둘째 아이가 있었다. 결혼 4년 만에 돌아온 딸은 고향에 얼마 머물지도 못하고 떠나 지금까지 타지를 떠돌고 있다. 최근에는 고향으로부터 200㎞ 떨어진 가죽공장에서 막 벗겨 낸 가죽을 소독하는 일을 하다 수차례 병이 났다. 이처럼 한국에서 돌아온 여성의 절반은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동네에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데다 가정 파탄의 주범인 양 보는 차가운 시선 때문이다. 베트남 귀환여성의 30%는 이혼 절차마저 마치지 못했다. 베트남 껀터·허우장에만 최소 300명 이상의 귀환여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딸이 낳은 두 아이는 흐엉에게 맡겨졌다. 첫째 손녀 이름은 김이은(가명), 둘째 손자 이름은 응웬쭝(가명). 같은 엄마·아빠를 뒀지만 태어난 나라에 따라 각각 한국인과 베트남인으로 국적이 다르다. 농사꾼인 흐엉의 아들은 자기 가족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살림으로 부모를 부양하면서 여동생의 두 자녀까지 거뒀다. 이따금 고단함이 폭발해 “너희 엄마랑 한국에 돌아가라”며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이미 두 아이에겐 익숙하다. 아직 어린 이 아이들이 눈치만 늘었다.

껀터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2019-09-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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