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화재로 가족나들이 낭패 본 30대…초등생 딸이 지갑털어 8천원어치 주유
‘도로 한복판에서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며 경고등이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이 버벅거린다. 신호등은 파란불로 바뀌었고, 뒤에서는 경적이 스테레오로 들려온다. 좌회전? 직진? 어쩌지?’‘현금만 가능합니다’
25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역 인근 한 가게 앞에 전날 KT아현국사 화재로 발생한 통신 장애로 카드결제 불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2018.11.25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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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눈에 들어오는 주유소 하나. 무작정 들어가 보니 카드결제가 안 된단다. KT에 불이 나서 그렇다고 직원이 설명해줬다. 결국 초등학교 2학년생인 딸의 지갑을 열었다. 지갑에 들어있는 돈은 7천원. 차 안에 굴러다니는 동전까지 끌어모아 8천원 어치를 주유했다.
급한 불을 끄고 주유소를 빠져나와 도로에 진입했을 때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새로고침’을 눌렀는데 반응이 없다. 그제야 휴대전화 통신사가 KT라 인터넷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일단 직진을 했는데 반포대교 방향이었다.
평소 내비게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해 온 ‘길치’라도 방향이 틀렸다는 것은 알아챘다. 핸들만 애꿎게 손으로 툭툭거리다 길옆에 있는 다른 주유소에 들어갔다. 천만다행으로 카드결제가 된다고 했다. A 씨는 직원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차례 반복했다.
기름을 넣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태원에 가려면 유턴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안내판에 의존해 이태원에 겨우 도착한 A 씨는 눈에 띄는 빌딩 주차장에 주차했다. 스마트폰 없이는 공영주차장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나서는데 직원이 “주차비는 현금으로 내야 한다”고 소리친다. 편의점 현금자동입출금기(ATM)도 작동이 안 되니 은행 ATM을 이용해야 한다는 팁도 전해줬다. 덕분에 은행에 들러 현금을 충분히 찾았다.
자녀들과 함께 이태원에서 열린 유기견 분양행사를 둘러본 A 씨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줄 때도, 터키 음식점에서 케밥을 사줄 때도 현금으로만 결제해야 했다. 주차장 직원에게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터키 출신의 음식점 사장은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카드결제가 안 되니 현금으로 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 소리에 손님들 대부분은 발길을 돌렸다. 사장은 아무래도 오늘 장사는 망한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지친 A 씨는 자신을 위해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지갑을 열어보니 남은 현금은 주차비를 제하고 1천원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며 차로 돌아갔다.
차에 앉아 집이 있는 노원구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일단 서울역 방향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명동역을 지날 때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여태껏 가장 힘들면서도 길게 느껴진 한나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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