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런 일이’ 달력 빨간 날 검게 칠하고 “평일 근무”

‘아직도 이런 일이’ 달력 빨간 날 검게 칠하고 “평일 근무”

입력 2017-05-14 16:20
수정 2017-05-1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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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반세기 지나도록 불법 노동행위 만연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우리가 빨간 날짜와 까만 날짜를 분간 못 하는 바보도 아니고…”

징검다리 황금연휴였던 이달 초 충북 음성의 중소기업 A사.

한 간부가 사무실과 공장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휴일인 부처님 오신날(3일)과 어린이날(5일)을 까맣게 색칠한 뒤 직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징검다리 연휴라 휴일이 너무 많아요. 다 놀 수 없으니 평일처럼 근무합니다.”

직원들은 어디에 하소연도 못 하고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속앓이를 해야 했다.

중·장년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이 회사 직원들은 휴일 근무에 대해 아무런 대가 보장도 없이 모두 정상 출근했다.

근로기준법에는 휴일 근로를 하는 경우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해 지급하거나 보상휴가를 주도록 규정돼 있지만 이 회사에서는 먼 나라 얘기다.

화가 치밀었지만 행여나 불이익을 받진 않을까 두려워 따지지도 못했다. 쭈뼛거리며 서로 눈치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이 직원들은 더 비참했다.

한 직원은 “법정 공휴일이라는 걸 삼척동자도 다 아는데 달력의 빨간 색을 까맣게 바꾼다고 평일이 되느냐”며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2017년 한국 노동 현실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 여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지 반세기 가까이 흘렀지만 ‘비정규직’이란 용어가 상징하듯 현실은 아직도 열악하다.

중소기업, 특히 고령층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방의 경우 정직원이라 해도 무늬만 정규직이다. 불안한 고용 지위 때문에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적은 임금에 시달린다.

평직원은 물론 간부 사원도 예외가 아니다.

과장, 부장 직책을 주고는 각종 수당을 없애기도 한다. 공장장이나 이사 자리에 오르더라도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한 달 월급이 300만원 남짓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승진을 기피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간부 직책을 떠맡기고는 월급 몇만 원 올려주고 연장근로 등 수당은 주지 않는다”며 “그렇다고 별다른 권한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간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대기업의 고용 구조 왜곡도 심각하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충주지청은 지난 3월 신세계푸드 음성 공장과 하청 업체 2곳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벌여 노동관계법 위반 사항 17건을 적발했다.

노동자 불법 파견과 근로계약서 미작성, 주휴수당·휴일근로수당·연장근로수당·퇴직금 미지급, 4대 보험 미가입, 산업재해 은폐 사실 등이 적발됐다.

신세계푸드는 일부 종업원에게 주 12시간 이상의 초과연장 근로를 시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나 시정지시를 받았다.

이 회사는 종업원 300여 명을 인력도급 업체와 직업소개소를 통해 다단계식으로 고용한 뒤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고용노동청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도급 계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고 근로자에 대한 지휘·명령권 행사에도 위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근로자의 날인 지난 1일 발생한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 사고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갑을 관계’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사망자 6명과 부상자 25명 등 피해자 31명은 전원 사내외 협력업체 직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다음 달 프랑스 업체에 인도할 해양플랫폼 건조 작업을 위해 휴일에 출근했다가 변을 당했다.

사고 당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현장에는 본사 직영 인력은 전체의 20%만 출근한 반면 협력업체 직원들은 절반가량 출근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 열악한 근로여건을 바로잡으려면 정확한 실태 조사와 원인 분석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2014년 이후 뚜렷해진 제조업 분야의 역성장,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 요인, 근로시간·휴가 사용, 법정 수당 지급 등에 관한 현황을 세밀하게 점검해야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경제학)는 “기업은 새로운 수익사업을 만들어내지 못해 매출 증가액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1997년 외환 위기 이전 대기업의 80% 수준이었던 중소기업 임금은 62%까지 떨어졌다”며 “산업경쟁력과 노동시장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대영 건국대 글로컬캠퍼스 겸임교수(공인노무사)는 “비정상적인 고용 형태는 비용보다는 고용의 유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법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노동 정책과 잘못된 노동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관리 감독 강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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