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과수 감정인 허위증언만으로 재심사유는 충분”
대법원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 개시를 결정함에 따라 이 사건이 발생 21년 만에 다시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됐다.재심 결정의 근거는 1991년 사건 당시 유죄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감정인들의 진술 중 일부가 허위로 판명됐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그러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인 강씨의 유서대필 여부 자체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했다.
국과수의 기존 감정결과와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재의뢰 감정결과가 엇갈리는데 어느 쪽이 우위에 있다고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심을 맡을 서울고등법원의 심리 결과에 따라 강씨의 유무죄가 가려질 전망이다.
◇”국과수 감정인이 허위증언” =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 필적감정을 담당한 국과수 소속 감정인 김모씨와 양모씨의 허위 증언이다.
김씨와 양씨는 필적감정 과정에 대해 “4명이 돌아가면서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토의했다”, “수시로 특징과 상이점이 나올 때마다 감정인들이 돌아가며 장비를 이용해 관찰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김씨, 양씨 외에 다른 두 명의 감정인은 “직접적으로 (유서필적) 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부분 감정을 김씨가 진행했고 우리는 공동심의란에 서명한 것이 전부”라고 상반되게 증언했다.
대법원에 앞서 재심 결정을 내렸던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를 토대로 김씨와 양씨의 증언이 허위라고 판단해 재심을 결정했다. 이후 검찰이 즉시항고해 대법원이 심리를 진행해왔다.
형사소송법 420조 2호에 따르면 원판결에서 증거로 인정된 증언이 확정판결에 의해 허위로 증명될 경우 ‘유죄를 증명할 다른 증거의 유무에 관계없이 소정의 재심사유가 있다’가 본다.
이번 사건은 김씨와 양씨의 허위 증언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돼 확정판결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형소법 422조는 이런 경우에도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증거가 있을 때는 재심 청구가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원심의 이 같은 판단은 정당한 것으로 형소법상 재심사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지 않았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유서대필 여부 ‘판단 보류’ = 대법원은 진실화해위원회가 내세운 사설감정기관의 필적감정 결과와 국과수로부터 새롭게 받은 감정결과에 대해 “예단이 감정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며 기존의 국과수 감정결과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재심청구 당시 국과수 소속 감정인 김씨가 감정한 문서를 3개 사설감정기관에 의뢰해 필적감정을 하게 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종전 국과수 감정결과와는 반대로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상이하다’는 감정결과가 일치되게 나왔다.
강씨의 다른 필적자료를 국과수 및 7개 사설감정기관에 감정의뢰한 결과에서도 역시 유서의 필적과 ‘상이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반면 분신자살한 김기설 전민련 사회국 부장의 것으로 알려진 전대협노트와 유서의 필적을 비교한 결과 국과수 및 사설감정기관 모두 ‘동일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대법원은 그러나 전대협노트가 김기설씨의 필적자료인지 단정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사설 감정인들은 전대협노트를 김기설씨의 필적자료라는 예단을 갖고 감정을 진행했기 때문에 유서와 전대협노트를 비교할 때는 유사점에 주목하고 강씨 필적과 유서를 비교할 때는 상이점에 이끌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씨 필적이 분명한 자료와 유서의 필적 동일성에 대해선 감정인마다 판단을 유보하거나 다른 결론을 내린 점도 결국 판단을 유보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재심에서 ‘대필여부 판단’ 내려질 듯 = 대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림에 따라 형사소송법 438조 1항에 의해 해당 심급(항소심)의 재심소송절차가 진행된다.
따라서 강씨는 다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유무죄 여부에 대한 새로운 판단을 받아볼 기회를 얻게 됐다.
일단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만 가지고 강씨의 유무죄 여부를 쉽사리 전망하기는 어렵다.
대법원이 재심을 결정한 것은 유죄판결의 증거가 된 감정인의 증언이 허위로 밝혀졌기 때문이지 강씨의 유서 대필 여부 자체에 대해 판단을 내린 게 아니다.
이와 관련, 대법원이 대필 여부에 대한 판단을 미룬 것은 재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어차피 대필 여부 판단은 실제 재심을 맡는 재판부의 몫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결국 향후 재심 재판의 법정공방을 거쳐 강씨가 유서를 대필했는지가 최종적으로 가려질 전망이다.
재심 재판은 강씨의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던 서울고법 형사10부에서 담당하게 된다.
한편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해 검찰은 “재심 재판이 시작되면 증거관계를 철저히 따져 보고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법정 공방을 벌일 것임을 시사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