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섬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공무원들을 위해 ‘사랑의 밥 봉사’를 펼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연평면사무소 신성만 면장의 부인 단춘남(47.여)씨.
단씨는 북한의 포 사격이 있던 지난달 23일 이후 10일 현재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면사무소 직원 25명의 세 끼 식사를 도맡고 있다.
초반에는 면 직원뿐 아니라 옹진군청에서 현지 파견을 나온 직원들까지 챙겨 한끼마다 30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양의 밥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단씨에게 밥 봉사는 정신적,신체적으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씨는 북한의 포격을 겪은 뒤 남편에게 “나도 인천으로 나가야 하지 않나”라고 운을 뗐었다.
면장인 남편이 연평도를 떠날 수 없을 테니,자식들을 위해 본인이라도 안전하게 육지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포격 후 연평도에 있기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 “괜찮다.당신이 가면 우리 직원들 밥은 어떻게 하느냐”며 설득했다.이미 다른 직원들의 가족은 모두 인천으로 떠난 터였다.
결국 단씨는 남편 곁에 남기로 했다.단씨는 “직원들도 있지만 차마 신랑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 매일 울며 전화해 “빨리 나오시라”고 할 때는 마음이 사무치게 아프고 두렵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짐짓 씩씩한 척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밥 봉사에 처음엔 눈까지 퀭해졌다.
대량의 밥을 해 본 적이 없어 한 끼마다 압력밥솥 2개를 놓고 3∼4번씩 밥을 해 날랐다.
큰 교자상 2개를 붙여놓은 ‘식탁’도 여러 번 치웠다.
아침식사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 다시 점심을 준비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는 통에 북한 포격 당시의 무서움을 잊기도 했다.
다행히 옹진군청이나 현지에 남은 주민들이 고맙게 고기나 생선 등을 보내줘 반찬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씨는 “처음엔 아침 세수도 못하고 점심까지 차리고,커피 한 잔 마실 틈도 나지 않았다.아침 시간이 그렇게 짧은 줄 처음 알았다”라고 웃었다.
1주일쯤 지나니 숙달이 돼 이제는 틈틈이 텔레비전도 보고 30분씩 쪽잠도 잔다.
단씨는 이제 “나도 내가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다.나중에 식당을 차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며 농담까지 던지는 여유를 가졌다.
단씨는 “직원들이 ‘사모님 덕분에 밥을 먹지 어디 가서 이렇게 먹겠느냐’고 말하면 참 고맙고 뿌듯하다”며 “어려운 고비를 같이 겪다 보니 서로 의지하고 직원들 간 우대관계도 더 돈독해졌다”라고 말했다.
면사무소 직원 장종일(32)씨는 “다른 직원 가족들은 다 나갔는데 면장님 부인이라는 책임의식을 갖고 남아서 밥을 해주시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며 “모든 직원이 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연합뉴스
바로 연평면사무소 신성만 면장의 부인 단춘남(47.여)씨.
단씨는 북한의 포 사격이 있던 지난달 23일 이후 10일 현재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면사무소 직원 25명의 세 끼 식사를 도맡고 있다.
초반에는 면 직원뿐 아니라 옹진군청에서 현지 파견을 나온 직원들까지 챙겨 한끼마다 30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양의 밥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단씨에게 밥 봉사는 정신적,신체적으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씨는 북한의 포격을 겪은 뒤 남편에게 “나도 인천으로 나가야 하지 않나”라고 운을 뗐었다.
면장인 남편이 연평도를 떠날 수 없을 테니,자식들을 위해 본인이라도 안전하게 육지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포격 후 연평도에 있기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 “괜찮다.당신이 가면 우리 직원들 밥은 어떻게 하느냐”며 설득했다.이미 다른 직원들의 가족은 모두 인천으로 떠난 터였다.
결국 단씨는 남편 곁에 남기로 했다.단씨는 “직원들도 있지만 차마 신랑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 매일 울며 전화해 “빨리 나오시라”고 할 때는 마음이 사무치게 아프고 두렵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짐짓 씩씩한 척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밥 봉사에 처음엔 눈까지 퀭해졌다.
대량의 밥을 해 본 적이 없어 한 끼마다 압력밥솥 2개를 놓고 3∼4번씩 밥을 해 날랐다.
큰 교자상 2개를 붙여놓은 ‘식탁’도 여러 번 치웠다.
아침식사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 다시 점심을 준비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는 통에 북한 포격 당시의 무서움을 잊기도 했다.
다행히 옹진군청이나 현지에 남은 주민들이 고맙게 고기나 생선 등을 보내줘 반찬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씨는 “처음엔 아침 세수도 못하고 점심까지 차리고,커피 한 잔 마실 틈도 나지 않았다.아침 시간이 그렇게 짧은 줄 처음 알았다”라고 웃었다.
1주일쯤 지나니 숙달이 돼 이제는 틈틈이 텔레비전도 보고 30분씩 쪽잠도 잔다.
단씨는 이제 “나도 내가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다.나중에 식당을 차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며 농담까지 던지는 여유를 가졌다.
단씨는 “직원들이 ‘사모님 덕분에 밥을 먹지 어디 가서 이렇게 먹겠느냐’고 말하면 참 고맙고 뿌듯하다”며 “어려운 고비를 같이 겪다 보니 서로 의지하고 직원들 간 우대관계도 더 돈독해졌다”라고 말했다.
면사무소 직원 장종일(32)씨는 “다른 직원 가족들은 다 나갔는데 면장님 부인이라는 책임의식을 갖고 남아서 밥을 해주시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며 “모든 직원이 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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