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딛고 미소찾은 나영이의 어린이날

악몽딛고 미소찾은 나영이의 어린이날

입력 2010-05-05 00:00
수정 2010-05-0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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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뒤 온천여행 가요…배변주머니 고민 없이”

“어린이날은 어린이를 위한 날이죠?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조두순 사건’ 피해자인 나영(가명·11)이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난스럽게 말해도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냥 느낌이 그래요. 어른들이 어린이를 위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경기 안산에 있는 집에서 나영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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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배변 주머니 제거를 위한 1차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도 열심인 나영이는 또래 아이들처럼 해맑았다. 악몽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겉옷에 가려진 배변 주머니는 여전히 나영이에게 족쇄였다.

●장시간 야외활동 아직 힘들어

‘어린이날’에 대해 묻자 금방 시무룩해졌다. 5일부터 학교가 단기방학에 들어가 닷새간의 황금연휴를 맞지만 나영이는 학교 가는 것이 더 좋단다.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하는 닷새 동안 무엇을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어린이날 한참 전부터 나영이는 아빠에게 놀이공원에 가자고 졸랐다. 특별히 받고 싶은 선물도 없고, 놀이공원이면 충분하다 싶어서였다. 아빠는 난감했다. 배변 주머니를 자주 비워 줘야 하는 나영이에게 장시간 야외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8시간 40분 동안 장기를 제자리로 되돌리고 인공항문을 이식하는 1차 수술을 받고 5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오는 여름방학에 2차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배변 주머니가 필요하다. 그래도 나영이는 어른스러웠다. 아빠의 설명에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쉬움은 남는다. “어린이날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내 “놀이공원을 통째로 받는 것!”이라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어린이날은 놀이공원에 사람이 많아 몇 시간씩 줄 서서 기다리다 보면 배변 주머니를 비우기 어렵다는 아빠의 말을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은 까닭이다. “내 놀이공원이라면 배변 같은 거 걱정 없잖아요.”

●“어린이날은 그냥 일요일”

나영이는 토·일요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 가는 날에는 친구들과 놀 수 있지만 휴일에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전부다.

사실 지난해·지지난해 어린이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잖아 어린이날을 특별히 챙겨본 기억은 없다. 잠깐 교회를 다녀온 것 말고는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나영이는 어린이날은 ‘그냥 빨간 일요일’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목욕탕’ 이야기를 꺼내자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언니의 시험기간이 끝나면 가족탕이 있는 온천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기 때문. 배변 주머니를 찬 후로 대중목욕탕 출입이 어려워진 나영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지다. 지난 설 연휴에 대전 유성온천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나영이는 세상이라도 얻은 듯 기뻐했다.

●“사실은 갈색 곰인형 원해요”

“내년 어린이날엔 배변 주머니 떼고 놀이공원에 꼭 갈 거예요. 6학년이 마지막 어린이날이잖아요. 그것 말고는 받고 싶은 선물 없어요.”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이 없냐고 다시 묻자 나영이는 “딱 하나 있는데… 곰 인형요. 갈색 곰 인형.”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2010-05-0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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