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주년] 김주열열사 추모·재조명 열기

[4·19혁명 50주년] 김주열열사 추모·재조명 열기

입력 2010-04-19 00:00
수정 2010-04-1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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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항쟁 불지핀 소년의 희생 50년만에 범국민장으로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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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에 불을 지핀 김주열 열사를 추모하고 재조명하는 활동이 활발하다. 김 열사의 희생이 오늘날 이 땅에 민주주의 꽃을 활짝 피게 한 밑거름이 됐다는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혁명 이후 군부 집권으로 고향인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묘역에 자리한 비석에조차 ‘열사(烈士)’라는 두 글자를 새길 수 없었다. 혁명 반세기를 맞은 19일, 누나 김경자(69)씨를 비롯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원시와 남원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새 묘비석 제막식에서, 떠돌던 ‘열사’ 두 글자를 넣고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내용도 추가한다.

김 열사는 마산상고 입학을 앞둔 1960년 마산에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경찰은 단순 행불로 처리했으나 27일 뒤인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 상태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그의 죽음은 마산 시민들을 움직여 4·11 마산민주항쟁으로 번졌고, 결국 전국 항쟁의 불을 지펴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당황한 경찰은 주검을 마산도립병원에 안치했다가 4월13일 밤 몰래 고향 남원으로 빼돌려 인양된 상태 그대로 선산에 안장했다. 숭고한 희생을 널리 알리기는커녕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가족들은 경찰이 무서워 입을 다문 채 모진 세월을 살아와야 했고, 민주항쟁의 진원지인 마산을 찾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국가나 사회도 그의 희생을 기리는 사업을 적극 나서지 않고 뒷전으로 미뤘다.

그의 희생은 그러나 결코 헛되이 버릴 수 없었다. 해가 갈수록 보석처럼 빛났다. 크고 작은 민주항쟁을 치르면서 정통성과 역사성을 따지다 보니 김 열사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 이 땅의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나설 때마다 늘 그의 희생정신을 앞세웠다. 1960~70년대 학생운동부터 198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 개헌운동 등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뿌리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1일 치러진 범국민 장례식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은 “50년 전 바다에서 참혹한 주검으로 떠오른 김주열 청년은 새롭게 부상한 선구자로 우리 앞에 다가왔으며 김 열사의 희생을 통해 이룩한 4·19 혁명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었다.”고 추모했다.

4·11 50주년 행사준비위는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자랑스러운 민주역사를 되새기고 민주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김 열사의 범국민장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4·11 민주항쟁은 한 청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지만, 4·11이 없었다면 4·19 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김 열사의 죽음은 이 땅의 민주주의 초석임이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2010-04-1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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