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이재오가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명박 정권의 2인자,실세,친이(친이명박)계 좌장으로 불리는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7.28 재보선에서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면서 여의도 재입성에 성공했다.2008년 4.9 총선 패배후 2년3개월여 만이다.
이 전 위원장이 호남 출신이 37%(호남.충청 합쳐 70%)에 달할 정도로 척박한 지역구 환경에다 야당과 박사모,노사모 등 사실상 ‘1대 다자’ 대결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바닥으로 긴 ‘나홀로 선거’ 전략 이 주효한 탓으로 풀이된다.
그는 중앙당의 지원을 거부한 채 비서 한 명만 데리고 구석구석을 누비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매일 아침 5시부터 자정까지 평균 40㎞가량 발품을 파는 강행군을 이어갔고,막판에는 ‘48시간 철야 선거운동’에 돌입했다.이틀 전인 26일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전거를 타고 12시간 유세를 벌였고,27일에는 아침 겸 점식 한 끼만 먹은 뒤 밤 12시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유세차량으로 골목골목을 누볐다.
그는 성심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공식선거 운동 시작 후에는 아예 육식을 끊었고,몸무게가 5㎏ 이상 빠졌다.
이 전 위원장 참모들은 “선거운동이 거의 철인3종 경기를 방불케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전 위원장은 30여년간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5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옥고를 치른 재야 출신 인사로,이명박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이 대통령과는 지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때 고려대(이대통령)와 중앙대(이재오)에서 각각 시위를 주도하며 만나 첫 인연을 맺었고,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 본선 때 이명박 캠프의 좌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하면서 최고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대선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치러진 4.9 총선에서 공천 파동과 정권견제론의 역풍을 받고 낙선하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총선패배 후 한 달 보름만인 5월26일 미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해 3월28일 귀국할 때까지 꼬박 10개월을 미국에서 보내야 했다.귀국 후에도 정치 현안과 거리를 둔 채 중앙대에서 강연을 하며 조용한 행보를 취했다.
그러다 지난해 9월29일 국민권익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낮은 자세로 부정과 부패에는 단호하게 맞서고,서민의 고충은 최대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권 창출과정에서 운명처럼 덧씌어진 ‘강경 투사’의 굴레를 벗었다.
이번 선거과정에서도 철저하게 반성하며 낮은 자세를 보였다.
그런 그에게 지역주민들은 “이재오가 달라졌네”라는 평가와 함께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지난 총선때 싸늘했던 밑바닥 민심에는 온풍이 돌았고,유세 현장의 한 주민은 즉석에서 극구 사양하는 이 전 위원장에게 자신의 고급 구두를 건네기도 했다.
그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여권의 중심으로 다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여권의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해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모래알 같은 친이의 구심점 역할을 맡을 경우 친박(친박근혜)과의 대립이 불가피하고,결국 당내 갈등이 다시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러나 이 전 위원장은 계속 낮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화합행보를 보일 것이라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갈등의 중심에 설 경우 곧장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대외 행보를 자제한 채 8월 내내 지역에서 당선사례를 하기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전 위원장은 야구모자에 티셔츠를 입은 채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벼 ‘자전거 의원’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고,고교 교사를 10여년간 지내 ‘국어선생님’이라고도 불린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권의 2인자,실세,친이(친이명박)계 좌장으로 불리는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7.28 재보선에서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면서 여의도 재입성에 성공했다.2008년 4.9 총선 패배후 2년3개월여 만이다.
이 전 위원장이 호남 출신이 37%(호남.충청 합쳐 70%)에 달할 정도로 척박한 지역구 환경에다 야당과 박사모,노사모 등 사실상 ‘1대 다자’ 대결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바닥으로 긴 ‘나홀로 선거’ 전략 이 주효한 탓으로 풀이된다.
그는 중앙당의 지원을 거부한 채 비서 한 명만 데리고 구석구석을 누비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매일 아침 5시부터 자정까지 평균 40㎞가량 발품을 파는 강행군을 이어갔고,막판에는 ‘48시간 철야 선거운동’에 돌입했다.이틀 전인 26일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전거를 타고 12시간 유세를 벌였고,27일에는 아침 겸 점식 한 끼만 먹은 뒤 밤 12시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유세차량으로 골목골목을 누볐다.
그는 성심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공식선거 운동 시작 후에는 아예 육식을 끊었고,몸무게가 5㎏ 이상 빠졌다.
이 전 위원장 참모들은 “선거운동이 거의 철인3종 경기를 방불케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전 위원장은 30여년간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5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옥고를 치른 재야 출신 인사로,이명박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이 대통령과는 지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때 고려대(이대통령)와 중앙대(이재오)에서 각각 시위를 주도하며 만나 첫 인연을 맺었고,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 본선 때 이명박 캠프의 좌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하면서 최고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대선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치러진 4.9 총선에서 공천 파동과 정권견제론의 역풍을 받고 낙선하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총선패배 후 한 달 보름만인 5월26일 미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해 3월28일 귀국할 때까지 꼬박 10개월을 미국에서 보내야 했다.귀국 후에도 정치 현안과 거리를 둔 채 중앙대에서 강연을 하며 조용한 행보를 취했다.
그러다 지난해 9월29일 국민권익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낮은 자세로 부정과 부패에는 단호하게 맞서고,서민의 고충은 최대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권 창출과정에서 운명처럼 덧씌어진 ‘강경 투사’의 굴레를 벗었다.
이번 선거과정에서도 철저하게 반성하며 낮은 자세를 보였다.
그런 그에게 지역주민들은 “이재오가 달라졌네”라는 평가와 함께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지난 총선때 싸늘했던 밑바닥 민심에는 온풍이 돌았고,유세 현장의 한 주민은 즉석에서 극구 사양하는 이 전 위원장에게 자신의 고급 구두를 건네기도 했다.
그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여권의 중심으로 다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여권의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해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모래알 같은 친이의 구심점 역할을 맡을 경우 친박(친박근혜)과의 대립이 불가피하고,결국 당내 갈등이 다시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러나 이 전 위원장은 계속 낮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화합행보를 보일 것이라는게 측근들의 설명이다.갈등의 중심에 설 경우 곧장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대외 행보를 자제한 채 8월 내내 지역에서 당선사례를 하기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전 위원장은 야구모자에 티셔츠를 입은 채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벼 ‘자전거 의원’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고,고교 교사를 10여년간 지내 ‘국어선생님’이라고도 불린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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