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4> 향천사의 얼굴 새긴 부도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4> 향천사의 얼굴 새긴 부도

서동철 기자
서동철 기자
입력 2015-12-10 13:38
수정 2015-12-1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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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무덤에 주인의 얼굴을 새겨놓는 전통은 없었다. 하지만 큰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일종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면, 향천사 부도는 귀한 사례일 것이다.

 충남 예산은 백제시대 오산(烏山)이었다. 이 오래된 땅이름의 흔적은 지금도 예산읍의 안산인 금오산(金烏山)에 남아있다. 향천사는 이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 의자왕 16년(656년) 의각대사가 세운 것으로 창건 설화는 전한다.

향천사 부도에 새겨진 혜희대사의 얼굴
향천사 부도에 새겨진 혜희대사의 얼굴
 향천사의 부도밭에는 두 기의 옛 부도가 있는데, 오른쪽의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도를 눈여겨 봐야 한다. 부도 왼쪽에 세워진 비표(碑表)에는 ‘멸운당대사 혜희의 탑’(滅雲堂大師惠希之塔)이라고 새겨져 있다.

혜희대사탑과 비표
혜희대사탑과 비표
 높이 210㎝로 당당한 멸운대사 부도는 조선시대 것으로는 조각이 세련된 편이다. 가까이 다가서면 팔각 지붕돌의 정면으로 내민 추녀마루에 작은 인물상이 하나 보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고승다운 품격에 연륜이 더해져 너그러운 인상을 풍긴다.

예산 향천사 전경
예산 향천사 전경
 향천사에는 멸운대사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해 금산전투에 참여했고, 전란이 끝난 뒤 불타버린 절을 중창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한다. 하지만 비표의 뒷면에는 숙종 34년(1708년)에 해당하는 강희 4년에 부도를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부도와 비표를 입적 이후 그리 많은 세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만들었다고 보면 임진왜란과는 100년 이상의 시차가 있다.

 수덕사에 있는 향천사 동종에 숙종 28년(1702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멸운대사가 주석하며 대대적으로 절을 중건한 시기도 이 언저리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높이 102.6㎝의 향천사 동종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에 공출되어 예산역까지 실려갔다가 광복을 맞아 극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부도에 주인공의 얼굴을 새기겠다는 발상은 파격적이다. 하지만 이 창조적 발상이 후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멸운대사탑에서 보듯 초상을 새겨놓고보니 ‘깨달음을 이룬 자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의 모습’이 강조되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웃한 수덕사도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앞장 선 만공스님의 부도인 만공탑을 1947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세웠다. 향천사는 수덕사의 말사다. 하지만전에 없던 부도를 창안한 향천사의 선구적 시대정신은 오히려 수덕사보다 앞섰다.

 글 서동철 논설위원 @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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