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8코스 신라호텔 숨비정원 근처에서 만나는 텅빈 벤치가 마치 자크 프레베르의 시처럼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는 듯 하다. 제주 강동삼 기자
#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고 한 마디 밖에 해줄 수 없는 나, 무기력 넘어 무력해진다‘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그대의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그대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가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 거릴 때,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스러울 때, 누군가가 슬픔으로 고통받을 때, 때론 그 고통에 삶을 내려놓고 싶을 때 생각나는 시(詩). 미국 시인 랜터 윌슨 스미스(Lanta Wilson Smith, 1856~1939)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다.
누군가가 절망으로 힘들어할 때 입버릇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게 전부인 자신을 볼 때처럼 자신이 초라해질 때도 없다.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어 이 한마디 밖에 던질 수 없음에 때론 무기력을 넘어 무력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하루 하루를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베릿내오름 남서쪽으로 파르나스호텔 너머 군산오름과 산방산, 멀리 송악산까지 아른거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 천제연 깊은 골짜기 사이로 은하수처럼 흐르는 물… ‘星川’ 베릿내
베릿내오름 옆으로 흐르는 은하수같은 물 ‘성천’, 베릿내오름 가는 데크, 하산길에서 만나는 중문바다. 제주 강동삼 기자
베릿내오름을 내려오다가 펼쳐지는 중문관광단지 앞바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올레길 8코스를 안내하는 간세. 제주 강동삼 기자
안녕, 친구에게.
예고와는 다르게 제14호 태풍 ‘풀라산’이 중국 대륙으로 가다가 방향을 급선회하며 제주에 밤새도록 많은 비를 뿌렸다. 그러다가 이튿날, 잠시 빗소리도 그쳤다.
3일간 뿌린 비 때문에 ‘꿉꿉해’ 있던 터라 몸이 근질근질해왔다. 가벼운 산책이라도 할 겸 집에서 멀지 않은 중문관광단지로 향했다. 폭염이 마지막 끝을 향해 가고 있었거든.
중문관광단지 내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인근에 ‘별이 내린 내’ 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 베릿내오름이 있다. 오름 옆으로 ‘흐르는 물이 은하수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베릿내의 ‘베리’는 벼루의 제주 방언으로 벼루란 낭떠러지의 아래가 강이나 바다로 통하는 위태로운 벼랑을 말한다. 참고로 베릿내오름을 오를 땐 광명사 주차장이 아닌, 반대편 남쪽 베릿내 포구 쪽에서 오르는 게 전경을 감상하기에 적절하다고 강추하고 싶다. 베릿내오름 입구에는 올레길 8코스(총길이 19.6㎞) 화살표와 간세가 먼저 반긴다.
간세 표시에는 ‘천제연의 깊은 골짜기 사이로 은하수처럼 물이 흐른다고 해서 성천(星川), 별이 내린 내라고 부르던 것이 베릿내가 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주차장 옆 나무계단을 오르면 베릿내포구와 함께 퍼시픽랜드(퍼시픽리솜), 파르나스호텔(옛 하얏트호텔), 산방산, 송악산까지 서쪽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풍경에 반해 20여분을 ‘쉬멍 놀멍 걸으멍’하면 어느새 정상이야. 소나무 두그루와 함께 넓은 데크 전망대가 다가온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나란히 그늘에 터를 잡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과 함께.
동쪽으로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와 함께 멀리 강정항에 크루즈선이 정박해 있는 모습과 범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앉지 않은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어. 먹다 남은 귤 하나를 깨물었어. 시큼상큼함이 입 안에 번지자 더위가 조금 가시더라.
더운 열기에 온몸에서 풍기던 비릿한 냄새가 가라앉을 때쯤 반대편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천제사, 광명사로 가는 절로 가는 길이야. 소나무 숲길이 끝나자, 북쪽에서는 베릿내오름의 시작이더라. 끝이 아닌 시작…. 그 반대편 끝에는 원주원씨(原州元氏) 홍천공묘역(洪川公墓域) 이라고 쓰인 돌표석이 눈에 띈다. 또한 이 일대가 원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임을 짐작하게 하는 유적비가 실제 베릿내 포구 앞에 세워져 있기도 했어.
베릿내오름 정상에서 만나는 데크쉼터. 제주 강동삼 기자
흐린 날 베릿내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바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너머로 강정항 크루즈와 범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 강동삼 기자
베릿내오름 북쪽에 자리한 사찰 광명사. 제주 강동삼 기자
#원주 원씨, 경주 김씨 등 6개 성씨가 설촌해 살던 베릿내… 방동화 스님이 창건한 광명사중문동 2631번지 주변 이곳은 100여년전 경주 김씨, 김해 김씨, 고부 이씨 원주 원씨, 남평 문씨, 평택 임씨 등이 설촌하여 20여가구가 살면서 포구를 개척 축조해 어업을 일으켜 해산물을 공급하고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광명사는 1949년 4월 8일 중문동에 항일 운동가 방동화 스님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래. 방동화 스님은 경술국치 이후 전국 최초이자 단일 지역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었던 1918년 법정사 항일 운동 당시 좌대장으로 참여했다가 일제로부터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고 하는구나.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을 겪으면서 방동화 스님이 거처하던 법화사와 원만사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는 피해를 입자 이듬해인 1949년에 중문동 2264번지에 새로운 터를 마련하고 광명사를 창건하게 됐대.
광명사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5년 12월 5일 현 위치인 중문동 2273번지로 이전하게 되었고 1996년 2월 4일 광명사 중건 불사 기공식을 가졌다. 난 1990년대 말만 해도 템플스테이의 참가 인원만 1년에 1000여 명 정도였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해. 외국인을 위한 영어 통역사도 상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중단된 듯 경내가 적막함만 감돈다.
광명사를 나와 언덕 아래 천제사를 끼고 돌아 나오다보면 천제연 폭포수가 베릿내 계곡을 따라 흐르며 내는 우뢰와 같은 폭포수 소리가 귀를 맑게 해준다. 그 물줄기를 따라 베릿내로 내려갔어. 다리 밑에서 몇몇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는 듯 했어.
베릿내천에서 낚시하는 모습이 마치 브래드피트 주연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제주 강동삼 기자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브래드 피트처럼 낚시 열중… 월척을 낚는 강태공
베릿내포구에서 낚싯꾼이 운수좋은 날 인듯 장어와 열대어 등 월척을 잡아 올렸다. 제주 강동삼 기자
베릿내천 다리에 누워 탐방객들 앞에서 권태로운 듯 재롱을 피우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년작)’ 주인공 폴(브래드 피트)처럼 인생 최고의 목표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듯 했어. 그리고 산책로에서 탐방객이 반가운 듯, 혹은 권태로운 듯,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데크에 누워 재롱을 피우고 있었어.
산책하고 나오다가 또다른 낚싯꾼을 만났다. 입질을 느꼈는지 낚싯대를 치켜들었고 이내 줄을 감으며 물고기와 한참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열대어같이 생긴 물고기 한마리를 잡아 올렸어. “월척이다”라며 내가 더 신난 듯 카메라를 연신 눌러대자 낚싯꾼은 이미 잡은 서너마리 장어까지 보여주며 뿌듯해했어.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인가봐.
친구야. 우리에게도 운수좋은 날이 오겠지?
건기에는 볼 수 있는 천제연 1단폭포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천제연 폭포 2단폭포의 모습. 마치 이형상 제주목사가 그린 ‘현폭사후’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제주 강동삼 기자
천제연 마지막 3단폭포. 제주 강동삼 기자
천제연 산책로에서 만나는 등록문화재 제156호 관개수로, 선임교, 칠선녀다리 선임교, 베릿내오름 산책로 옆으로 흐르는 관개수로. 제주 강동삼 기자
#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천제연 3단폭포와 신라호텔 ‘쉬리벤치’1970~1980년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온 신혼 여행지 제주에서 가장 많이 들르던 관광명소가 정방폭포, 천지연, 그리고 이곳 중문 천제연 폭포일거야. 지금 MZ세대들은 비가 오고나면 어김없이 엉또폭포로 가서 어마무시한 폭포수에 빠지지만, ‘라떼에는 말이야’ 이 천제연 폭포를 보지 않으면 제주관광을 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필수 관광코스였어. 그리고 ‘라떼에는’ 셀프 인증샷을 찍을 만큼 카메라가 귀해 관광지 전문 사진사의 도움을 받아 한컷 찍어야 관광의 방점도 찍었다.
매표소 입구에서 나눠준 팸플릿에는 천연기념물 제378호 난대림지대와 무태장어서식지(천연기념물 제27호), 천제연 관개수로(등록문화재 제156호)가 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칠선녀의 하얀 날개옷 만큼이나 아름다운 1단폭포와 계곡 천제연은 옥황상제를 모시는 천상의 선녀들이 별빛 영롱한 밤에 자줏빛 구름을 타고 몰래 내려와 맑은 물에 미역을 감고 노닐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하느님의 연못’이라는 뜻으로 천제연(天帝淵)이라고 안내한다. 2단과 3단 폭포로 가는 계곡 위에는 아름다운 일곱 선녀상을 조각한 칠선녀다리인 선임교와 천제루라는 누각도 있다.
천제연 폭포는 한라산에서 시작된 중문천이 바다로 흐르면서 형성된 3단 폭포야. 주상절리 절벽에서 천제연(못)으로 떨어지는 제1폭포, 천제연의 물이 더 아래로 흐르면서 형성된 제2, 3폭포가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제1폭포는 높이22m, 천제연 수심 21m로 건기에는 폭포수가 떨어지지 않지만 이날은 마침 제14호 태풍 풀라산 덕분에 낙하하는 폭포수를 만난, ‘운수좋은 날’이었다. 제1폭포 근처에 있는 암석동굴 천정에는 이가 시리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백중, 처서에 이물을 맞으면 모든 병이 사라진다는 설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수영이 금지돼 진입할 수 없단다.
제2폭포는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하다. 비온 뒤 여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겨 더욱 동양적인 신비함으로 다가온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제주도 순력중인 1702년 11월초 6일 천제연 폭포에서 활쏘는 모습을 그린 ‘현폭사후’ 그림이 온전히 되살아나는 느낌이야.
3단 폭포를 만나러 가는 데크 옆으로는 관개수로가 시냇물처럼 흐른다. 지표수가 부족해 논농사에 부적합한 제주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천제연 폭포의 낙수가 흐르도록 천연암반 지형을 파서 만든 2㎞의 장거리 관개수로야. 이 농업용수 시설로 천제연 일대 23만 1000㎡의 불모지가 옥답으로 변했단다.
중문관광단지 중문색달해변 퍼시픽리솜 앞 정원에서 만나는 색다른 포토존 벤치.
베릿내오름 남쪽 바로 건너편에 중문관광단지내 호텔 중 가장 제주스런 초가지붕으로 꾸며진 특급호텔 씨에스호텔 정원 벤치에서 바라본 절경.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올레길 8코스에 속하는 씨에스호텔로 가는 길, 정원에서 만나는 바다를 향한 벤치. 제주 강동삼 기자
신라호텔 숨비정원에서 만나는 영화 쉬리의 마지막 배경이 된 ‘쉬리 벤치’. 제주 강동삼 기자
# 텅빈 벤치, 비에 젖은 벤치… 자크 프레베르의 시처럼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중문관광단지내에는 신라호텔, 롯데호텔, 파르나스호텔(구 하얏트호텔), 그랜드조선호텔, 씨에스호텔 등 특급호텔들이 즐비해. 그 가운데서도 이곳 베릿내오름 바로 앞에 자리잡은 씨에스호텔은 제주다운 멋을 자랑하는 초가집 구조를 띤 호텔로 운치가 있다. 호텔 앞에서 펼쳐지는 오션뷰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워. 야외결혼식 명소로도 꼽힌다. 올레길 8코스에 속해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해. 곳곳에 포토존 벤치들이 있어 벤치에 앉아 잠시 쉼표해도 좋다.
중문관광단지내 벤치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단연 신라호텔 내 숨비정원내에 있는 ‘쉬리벤치’일거야. 강제규 감독의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던 벤치로 한때는 관광코스처럼 들르던 명소였잖아. 세월이 흐르면 때론 사라지거나 버려진 영화촬영지들도 있지만, 신라호텔 측은 ‘쉬리벤치’를 잘 보존하고 있어 반갑고 고맙더라.
오름을 다니다 보면 많은 벤치를 만난다. 주인을 기다리 듯 텅 빈 벤치에 가랑잎이, 솔잎이 깔려 있는 모습을 보면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다. 비에 젖은 벤치, 낡은 벤치…. 아무도 앉아 있지 않는 벤치의 뒷모습을 보면 자크 프레베르의 시(詩)처럼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신라호텔 앞 숨비정원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야자수와 바다가 마치 남태평양 휴양지에 온 느낌을 자아낸다. 제주 강동삼 기자
쉬리벤치. 제주 강동삼 기자
‘광장의 벤치에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는 한 남자가 있다./외안경과 낡은 회색 양복 차림으로/여송연을 피우며 앉아/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아니 그냥 손짓을 해보인다/그를 보아서는 안된다/그의 말을 들으면 안된다/그냥 지나쳐야 한다/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마치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걸음을 재촉하며 지나쳐야 한다/혹 당신이 그를 쳐다본다면/혹 당신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면/그가 당신에게 손짓을 할 터이니/당신은 그의 곁에 가 앉을 수 밖에…’
‘절망’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늙어버린 미래의 나를 보는 듯, 그곳으로 가 절망이란 친구에게 위로해주고 싶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