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기타’를 멘 51세 ‘기타 키드’ 김종진

‘전설의 기타’를 멘 51세 ‘기타 키드’ 김종진

입력 2013-09-11 00:00
수정 2013-09-1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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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력을 10% 더 키워준 하이럼 블락의 기타…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이렇게 기타 얘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서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과의 인터뷰 도중 부인인 배우 이승신이 무심코 던진 얘기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를 보고 싶다는 요청에 흔쾌히 응한 김종진이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기타에 대한 그의 열정은 18살 소년의 그것과 다를 것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51세의 ‘기타 키드’ 김종진을 만난 것은 지난달 27일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였다.
지난달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로 즉선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지난달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로 즉선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전설의 기타를 입수한 ‘축복받은 남자’

김종진과의 인터뷰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진 그의 기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김종진의 기타는 1980년대 미국 최고의 재즈·블루스 기타리스트인 하이럼 블락이 연주하던 것이다. 김종진이 기타를 입수하게 된 것은 지난 1994년. 원래 주인이었던 블락은 그 후로 2008년 인후암 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14년 동안 기타를 잡지 않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거장의 기타’가 김종진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처음 이 기타가 시장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이죠”

1994년 당시 미국에서 녹음작업을 하고 있던 김종진은 버클리음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동료 기타리스트 한상원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블락이 연주하던 기타가 뉴욕 맨하탄의 빈티지 악기점에 들어왔다는 내용이었다.

한상원은 김종진을 ‘빈티지 기타’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한상원은 마약에 찌들어 있던 블락이 한 클럽에서 기타와 바꿔 마약을 샀고, 이 기타가 중고 시장에 팔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절친인 김종진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블락은 당시 난다긴다하는 뮤지션들이 모여있는 뉴욕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기타리스트였다. 김종진 역시 미국에 건너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그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블락이 자신의 눈 앞에서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넋을 잃었다고 전했다. 공연이 끝나고 말이라도 한 마디 건내볼까 하는 생각에 클럽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토록 동경하던 기타리스트의 애장품을 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위 바이 기타즈’(We Buy Guitars)란 이름의 악기점으로 달려간 김종진은 기타를 확인하고 환희에 가득찼다. 악기상이 제시한 가격은 단돈 8000 달러. 당시 우리 돈으로는 650만원 정도의 사실상 ‘헐값’이었다.

김종진이 기타를 입수한 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기타를 그리워하던 블락은 함께 밴드 활동을 하던 베이시스트 윌 리를 통해 기타를 되팔수 없느냐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직접 윌 리를 만난 김종진이 “블락이 다시는 마약에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냥 돌려 주겠다”고 말하자 윌 리는 “그냥 네가 간직해라”라며 포기했다고 한다. 그렇게 ‘전설의 기타’는 김종진의 것이 됐다.

김종진의 기타가 화제가 된 것은 지난 2007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1억원의 감정가를 매기면서부터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떠돌던 기타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 소장하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 최대 1억원의 경매가 매겨진 이 기타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져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 소장하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 최대 1억원의 경매가 매겨진 이 기타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져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제가 이 기타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본인 수집가가 ‘꼭 갖고 싶으니 가격을 제시해라. 원하는 가격을 말하면 사겠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팔 생각이 없고 조금 더 이 녀석을 연주하고 싶어서 거절했었습니다”

지금도 모든 공연에 이 기타를 매고 나가는 김종진은 ‘전설’이 주는 소리의 마법에 아직도 매료된 듯 보였다. 그는 “이렇게 좋은 기타를 연주하는 저도, 소리를 듣는 청중들도 모두 축복받은 셈”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명확히 소리가 좋은’ 기타가 풍기는 아우라

군데군데 흠집이 난 김종진의 낡은 기타가 풍기는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발터 벤자민이 말한 ‘아우라’라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종진은 이 기타를 구입한 뒤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바로 기타의 바디(몸통) 윗부분과 픽업(줄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꿔 소리를 증폭시키는 부품) 주변을 누군가 깎아낸 것이다. 실제로 그냥 우연히 닳았다고 볼 수 없는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마 이 기타를 만든 장인, 혹은 하이럼 블락이 소리를 조율하기 위해 일부러 자국을 낸 듯 해요. 그만큼 소리에 신경을 쓴 물건이란 것이죠”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 소장하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 바디(몸통) 부분. 바디 윗부분과 픽업 주변에 누군가 일부러 깎아낸 흔적이 눈에 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 소장하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 바디(몸통) 부분. 바디 윗부분과 픽업 주변에 누군가 일부러 깎아낸 흔적이 눈에 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김종진의 기타는 외관 상으로 팬더사의 대중적인 모델인 스트라토캐스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기타는 1962년판 스트라토캐스터의 바디에 1961년판 깁슨사의 험버커 픽업(싱글 픽업을 두개 겹쳐놓은 부품)이 달려있는 수제 기타다. 김종진은 “1961년에 넥(기타의 목)을 만든 뒤 이듬해 바디에 끼워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당시에는 이렇게 각자의 부품을 조합해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진은 1년에 한번 하이럼 블락이 사용할 때부터 이 기타를 세팅해주던 로저 사도스키라는 루티어(현악기 제작자)에게 기타를 맡긴다. 사도스키의 세팅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소리를 내게 해주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기타의 소리는 어떨까? 김종진은 “저음에서는 뭉글대고, 중음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나며 고음에서는 배음(원음보다 몇배의 진동수를 가진 음)이 일반적인 것보다 확장돼서 들린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쉽지는 않은 부분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에게 김종진은 “쉽게 말하자면 ‘명확히 소리가 좋은’ 기타죠. 숫자로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집니다”라고 다시 설명했다.

● “데이터로 평가할 수 없는 최상의 기준, ‘좋은 것’에는 항상 ‘안목’이 따르죠”

“이 기타를 들고 연주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퍼져요. 소위 말하는 ‘음악혼’이 불타는 기분이랄까요”

김종진은 일종의 ‘토테미즘’(무속신앙)과 같다는 말과 함께 “이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10%는 더 연주가 잘되는 듯 하다”는 말을 했다. 육상의 우사인 볼트가 ‘마법의 신발’을 신고 자신의 최고 기록을 10% 단축하는 것쯤으로 설명하면 될까. 반신반의하는 기자를 향해 그는 말을 이어갔다.

“데이터로 표현할 수 없는 상위의 기준은 존재하고 있어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니콜로 파가니니가 연주를 하자 청중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잖아요. 저도 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정말 그런 것이 있구나’란 느낌을 받았어요. 경이롭다고 할까요”

김종진은 이 기타를 손에 넣은 뒤 자신의 음악도 한단계 끌어올리게 됐다고 했다. “하이럼 블락의 기타를 가졌으니 그와 같은 수준의 음악을 해야한다”는 목표의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김종진은 가장 많이 반복했던 단어는 ‘좋은 것’과 ‘안목’이었다. 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것은 분명히 있다”면서 “그 좋은 것을 찾아내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안목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또 “진짜 예술은 진정한 안목이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데서 시작된다”면서 “그들의 안목을 빨리 파악하면 당대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 ‘안목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종진 역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다만 “재능과 경험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인터뷰를 마친 뒤 김종진은 기자를 위해 직접 즉흥 연주를 들려줬다. ‘안목’이 떨어지는 ‘범인(凡人)의 귀’로 듣기에도 확실히 다른 울림을 가진 소리였다. 비단 악기 본연의 소리 뿐이랴. 국내 최정상 기타리스트의 연주에는 그의 영혼도 담겨 있었다. 넋을 놓고 연주를 감상하고 난 뒤에야 “명확히 좋은 소리”라는 김종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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