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역사를 갈랐다] (33) 배구자와 최승희

[선택! 역사를 갈랐다] (33) 배구자와 최승희

입력 2012-11-05 00:00
수정 2012-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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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집안… ‘스펙’에 무릎 꿇은 ‘최승희 라이벌’ 배구자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하면 보통 최승희(崔承喜)를 떠올린다. 무용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그녀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구자(裵龜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 낯선 이름의 여성이 사실은 최승희보다 먼저 한국 무용의 새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배구자는 왜 최승희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최승희는 1911년 최준현의 4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큰오빠 최승일은 니혼대학 문과를 졸업한 뒤 소설가, 시인, 극작가, 연출가, 영화제작자로 활동했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하게 된 것이나 남편 안막(安漠)을 만나게 된 것도 최승일의 권유와 주선 덕분이었다. 교사였던 작은오빠 최승오나 언니 최영희 모두 신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일제에 재산을 빼앗기면서 가세가 기울기는 했으나 최승희는 유년시절까지는 명문가인 해주 최씨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곱게’ 자랐다.

배구자
배구자
●출생의 비밀, 있다, 없다?

반면 배구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사실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배구자 자신과 동생이 남긴 그녀의 출생 관련 비밀(?)에 대한 언급들 때문이다. 배구자는 노년에 “나는 메이지천황의 10번째 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동생 배한라는 “언니가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고모 정자(裵貞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던 까닭에”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즉, 당사자와 그 최측근 사이에도 배구자의 친부모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메이지천황의 딸이라거나 이토 히로부미의 사생아라는 주장도 학계에선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황상으로나 다른 사람들의 증언 및 기사 등을 토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의 조카라는 쪽이 유력한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같은 ‘허황된’ 언급을 한 것이 다름 아닌 배구자 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 배구자의 ‘정체’를 서술하는 데에는 애초부터 곤란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배구자가 무용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배정자가 유명한 친일 민족반역자였다는 점도 후대에 배구자가 한국무용사에서 주목받게 하는 데 큰 걸림돌이었다.

●무용계 입문… 진로의 갈림길

최승희는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바쿠의 제자로 무용계에 입문했다. 최승희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남성 현대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의 스승이기도 한 이시이바쿠는 서양 발레의 엄격한 기교와 형식을 넘어선 신체의 해방과 내면세계의 표현을 강조하는 무용가였다. 그를 통해 최승희는 서양 발레의 기본기를 익히고 춤에 민족적 정서를 담아내는 법을 배웠다.

한편 배구자는 일본의 유명한 곡예단인 덴카쓰(天勝) 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매료돼 배정자의 주선으로 그곳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덴카쓰 예술단은 쇼쿄쿠사이 덴카쓰(松旭齊天勝)에 의해 1900년 창단됐으며, 마술·곡예·무용·연극 등을 공연하는 종합예술단체였다. 이 단체에서 배구자는 2년간 교육을 받은 뒤 1918년 귀국하여 공연을 펼쳤는데, 이때의 공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어린 조선인 소녀가 일본 유명 예술단의 중심에서 공연을 펼친다는 사실 때문에 국내에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배구자는 1924년 덴카쓰의 해외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서양무용을 접하고 발레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덴카쓰 예술단 생활에 염증을 느껴 1926년 탈퇴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2년 뒤 배구자는 주변 흥행사들의 권유로 음악무용회를 열며 복귀했다. 이어 1929년 배구자는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세우고 발표회를 열면서 독립적인 무용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첫 무용발표회 후 배구자는 돌연 자신의 연구소 명칭을 ‘배구자예술연구소’로 바꾸고 공연내용도 무용에 조선민요와 연극적 요소를 결합한 가무극 형태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배구자의 가극단은 조선 각지와 일본에서 가무극 순회공연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31년에는 나운규의 영화 ‘10년’에 출연하기도 한다.

배구자가 무용만이 아닌 노래, 춤, 연기의 종합예술 쪽으로 선회하게 된 이유에 바로 최승희가 있었다. 이시이바쿠의 문하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무용연구소를 내고 1930년 발표회를 가졌던 최승희는 덴카쓰 예술단 출신인 배구자와는 ‘격’이 다른 무용가로 평가되었다. 흥행 면에서는 배구자 일행의 공연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냈지만, 평론가들은 예술성과 정통성을 근거로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더 높게 평가했다.

최승희
최승희
●최승희, 인텔리 프리미엄

더구나 학벌에 있어서도 보통학교도 못 나온 배구자에 비해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최승희는 인텔리 출신 무용가라는 프리미엄도 얻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몸’의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1935년 배구자 부부와 함께 동양극장을 설립했던 작가 최독견은 1964년 ‘낭만시대’라는 실명소설에서 “배구자나 최승희가 다 같이 무용가로 자처했지만 무용가로서 필요한 육체적 조건이 최승희를 따라 갈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배구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후릿한 키에 미끈한 다리, 마치 인어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최승희의 그것에 비하여 배구자의 앙바틈한 키의 짧은 다리는 노랑 저고리 다홍치마에 긴 머리를 땋아 늘인 한국처녀의 물 긷는 맵시춤쯤이 고작이었다.”고 회고했다(‘낭만시대’, 조선일보, 1964년 12월 10일). 후대에까지 배구자보다 최승희가 높이 평가된 데에는 그들의 신체적 조건의 차이도 한몫 했다.

●사회주의 문인 남편·호텔 종업원 출신 남편

배구자와 최승희의 비교 항목에는 이 외에도 남편이 들어 있었다. 안막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 사회주의자 문인이었고 배구자의 첫번째 남편 홍순언(洪淳彦)은 보통학교 학력에 호텔 종업원 출신이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두 사람의 차이는 남편의 외조와 문화예술에 대한 태도에 있었다.

물론 홍순언도 1930년대 국내 유일의 연극 전용 극장이었던 동양극장을 설립하고 극단을 근대적 시스템으로 운영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문화예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안막은 프롤레타리아 예술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서 예술, 문화를 통해 민중의 각성을 꾀했던 인물이다. 배구자 부부가 상업성과 대중성에 제1의 목표를 뒀다면, 최승희 부부는 예술성과 민족의식 고취에 더 큰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배구자가 가무극 공연으로 조선과 일본에서 흥행몰이를 함으로써 대중적 스타로 활약하고 있을 때, 최승희는 서양 무용과 동양 무용 그리고 여기에 조선의 민족적 색채를 더해 국제적 무용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홍순언이 동양극장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데 반해 안막은 최승희의 헌신적인 매니저로서 그녀의 무용 공연을 기획, 홍보하는 데에 전념한 든든한 조력자였다. 이러한 남편의 외조에서의 차이가 배구자와 최승희의 사후 평가를 달리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였다.

●한 사람은 미국으로, 한 사람은 북한으로

그러다가 1938년 홍순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동양극장은 파산하게 된다. 얼마 뒤 배구자는 광산재벌과 재혼하면서 공연계에서 은퇴하고 배구자가극단도 해체한다. 해방 후 남편이 친일파로 몰리자 배구자는 일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일본계 미국인과 다시 결혼해 미국에서 말년을 보냈다.

최승희는 일제 말기 국방헌금을 내고 일본군 위문공연을 여는 등 친일적 행위를 했다. 당시로선 유명 예술가가 계속 활동을 하기 위해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았겠으나(그녀는 한편으로 안막을 통해 조선독립군을 후원했다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냉정하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해방 후 최승희는 남편 안막의 권유로 월북했으며 북한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1969년에 숙청된다.

이렇게 배구자와 최승희는 모두 해방 후 한국 땅을 떠났다. 그리고 한동안 둘 다 잊혀졌다가 월북 예술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진 1980년대 후반 이후 최승희는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구자는 우방국인 미국으로 건너갔고 2003년까지 근 백수를 누렸던 만큼 더 일찍 복원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한국무용사에서 그동안 배구자에 대해 관심이 적었던 것은 이들의 1940년대 이후 행보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최승희는 숙청되기 전까지 북한에서 무용가로서의 삶을 지속했으나 배구자는 해방 이전에 이미 은퇴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배구자가 최승희만큼 주목받지 못해 온 또 다른 이유이다.

●다시 보자 배구자, 최승희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이 다 온당한 것도 아니고 이런 것들 때문에 배구자가 잊혀지기엔 한국 무용과 예술·문화사에 끼친 공적이 적지 않다. 그녀가 선택한 인생이 최승희와는 달랐지만, 그녀 역시 한국 근대무용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연문화를 조성하는 데, 예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배구자가 가족사나 자신의 행적과 관련한 오점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면, 최승희도 마찬가지다. 또한 우리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에 대한 위계적 시선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승희의 예술적 업적만큼이나 대중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공연문화 개척에 남긴 배구자의 업적 또한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영아(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2012-11-0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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