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점, 점. 수없이 찍혀진 점과 점들. 화면은 찍혀진 점들로 가득하다. 푸른 점. 점은 하나로 출발하여 둘이 되고, 둘은 여럿으로 무리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은 수많은 점들이 되어 화면 전체를 이룬다. 화면 가까이 서면 화면은 점을 보여주고, 멀어지면 거대한 일렁임이 있는 점들의 합창을 들려준다. 그 합창이 노래하는 것은 푸른 하늘, 별, 그리고 그 별빛을 머금은 물빛 바다이다. 화면이 들려주는 이미지는 울림이 되어 보는 사람을 휘감는다. 공명하는 거대한 화면. 김환기의 공간, 작품이다.
점, 선, 면. 화면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를 말할 때 늘 언급되는 세 가지. 평면의 화면은 수학의 기본도형 원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점은 그러므로 선을 이루는 기초 단위이고, 선은 면을 이루는 최소 단위가 된다. 평면의 조건. 평면의 최소단위 점. 점으로만 이루어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은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 근간-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관심을 읽을 수 있다.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김환기가 한국일보사가 개최하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이 작품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다. 1970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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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도
1938년, 캔버스에 유채, 60.7×72.6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64년 뉴욕으로 건너 갈 때 김환기는 52세. 안정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뉴욕 행을 결행하였다. 전남 신안 기좌도(현 안좌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환기는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유학을 통하여 새로운 흐름의 미술에 눈을 떴고, 새 경향의 미술을 추구하였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교수. 홍익대학교 교수, 학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미술 추상의 1세대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견 안주할 수 있는 여건. 당시의 한국의 미술은 식민지 시대의 구시대 미술을 걷어내고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기로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 앵포르멜 운동이 뜨겁게 몰아치던 시기. 청년 미술의 태동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유스럽고, 풍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기에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유학과 파리에서의 체류로 세계적인 흐름을 목격한 김환기에게는 만족할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 새로운 작품. 더 나은 작품을 남기는 작가. 그의 그러한 욕망은 현대미술의 본 고장, 뉴욕으로 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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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1958년, 캔버스에 유채, 65x 81 cm
그의 작품세계는 일본유학시기(1930년대~1940년대 초반), 해방 후부터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1945~1963), 뉴욕시기(1964~1974)로 구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본 유학시기에서 해방 전의 작품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론도’(그림 2)에서 보여 지는 구성주의적 요소의 추상작업을 선보였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그의 작품은 한국적인 소재로 그리는 반추상의 그림이었다. 달, 여인, 사슴, 매화, 항아리 등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에는 대상들이 단순화 되고, 반추상 되어 나타난다. 물감을 두껍게 발라올린 두터운 질감의 화면은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단순한 공간이 아닌 서정의 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서정이 깃든 빈 여백. 그 공간들은 한국의 미가 비어있음, 여백의 미로 보는 그의 시선에 기인한다고 보여 진다.(그림3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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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I-68(II)
1968년, 신문지에 유채, 58.3×37.3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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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II-73
1973년, 캔버스에 유채, 263.0×213.0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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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V-74, #332,1974
1974년, 캔버스에 유채, 177.8×86.4cm, 개인 소장
뉴욕 행 이후 김환기의 작품에서는 알고 있는 대상이 사라진다(그림4,5,6) 알 수 있는 사물이 사라진 화면을 차지하는 것은 점들이다. 점이 만드는 세계. 이 세계를 만나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비우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은 몸일 뿐 그의 정신은 외려 고향에 닿는다. 밤하늘의 별을 통해 그 별이 만든 점들을 통해. 낯선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그는 고향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별들은 뉴욕의 밤하늘에서 빛났고, 그 별을 통하여 고향의 하늘, 소식을 들으려 했을 것이다. 별, 점, 그 속에는 농밀하게 번지는 그리움이 있다. 그 그리움은 별이 빛나듯이 화면에도 스며들어 있다. 거대한 화면이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그러한 그리움을 별들로, 점으로 스미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제목이면서 김광섭(金珖燮) 시의 구절이다. 시인 김광섭은 김환기의 친구. 친구의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린 「저녁에」(아래 상자 참조)를 읽고 붙인 제목이다. 유심초가 부른 동명의 노래도 있다. 제목 그대로 언제고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움은 별빛이 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점은 그러므로 별이고, 동시에 그리움이라 말할 수 있다. 별과 그림과 노래와 시가 하나의 제목에서 만났다.
틀에 천을 씌우고, 천에 아교 칠을 하면서 퍼져가는 무한의 공간, 우주와 별. 그리고 그리움을 상상했을 작가. (물감의 농담을 위해 작가는 면천에 아교 칠만 하였다.) 점과 점을 그려가면서 물감이 만드는 농담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작가의 숨결이다. 김환기 작품의 풍부한 덕목은 작품에 작가의 숨결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그 숨결이 드러나는 것은 점과 점 사이의 농담이다. 점은 점마다 각자의 농도로 자리하고 있어 들숨 날숨처럼 호흡을 지닌다. 그 호흡이 확장되어 화면은 거대한 리듬으로 울림을 만든다. 그 울림은 고향의 울림이며, 바다와 별들의 울림이다.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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