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라. 보아라. 최재림의 유령이 왔노라.

등장하는 첫 순간부터 작정한 듯 토해내는 목소리가 압도적이다. 데뷔 14년 차에 마침내 ‘오페라의 유령’을 만난 최재림은 그간 달려온 시간을 무대 위에 제대로 압축해냈고 최전성기를 달리는 배우다운 자신감을 한껏 뿜어냈다.

13년 만에 한국어 공연으로 돌아온 ‘오페라의 유령’이 3~6월 부산 공연을 마치고 지난달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했다. 부산 공연에서 유령을 맡았던 조승우, 전동석, 김주택에 더해 최재림이 서울 공연에 지난 11일부터 새로 합류했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최재림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굉장히 기분이 좋다”면서 “이렇게 기회를 얻기까지 노력도,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상을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유령이 남자 배우들에게 꿈의 역할로 꼽히는 데다 최재림은 2009년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에서 떨어진 기억이 있어 더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오페라의 유령’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1868~1927)가 1910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세기 프랑스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흉측한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지하에 숨어 사는 천재 음악가 팬텀(유령)과 그가 사랑하는 크리스틴,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귀족 청년 라울의 이야기를 그렸다.

유령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섬세한 연기는 물론 탄탄한 성악 발성까지 필수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채 허우적대는 감정의 요동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고, 캐릭터의 성격에 맞게 강한 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학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연기를 배운 최재림으로서는 제대로 물을 만났다. 최재림은 “뮤지컬 하면서 성악 발성을 쓴 작품이 없었는데 공부했던 발성을 이번에 처음으로 쓴다”라면서 “관객들이 봤을 때 ‘음악 잘하는 배우’란 말을 듣게 한 전공을 쓰는 거라 재밌고 감회가 새롭다”라고 말했다. 벼르고 별렀던 노래를 처음 관객들 앞에 선보였을 때는 ‘들어라’ 하는 생각으로 불렀다는 자신감도 드러냈다.

연기에 관해서는 “인물의 성격을 어느 정도 표현해야 관객들에게 캐릭터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 많이 했다”면서 “목소리 자체가 진하니까 강요하고 명령하는 느낌을 낼 수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노래마다 목소리 톤을 바꿔가며 감정의 전달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이 있었다.최재림은 10월 개막하는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으로도 캐스팅됐다. 유령과 장발장 모두 남자배우들의 로망으로 꼽힌다는 점에서 최고점에 오른 그의 현재 주가를 알 수 있다.

최재림은 “두 작품 다 20대 때 오디션을 봐 떨어졌었는데 인간적으로나 배우 경력으로나 많이 성숙해진 지금 맡게 돼서 다행”이라며 “20대 중반만 해도 젊음의 패기와 혈기 때문인지 자만했던 것 같다. 지금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보다 이면의 감정을 잘 담기 위해 고민한다”라고 말했다.

까딱하면 오만해지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금방 무너질 수 있음을 알기에 늘 자기 객관화를 통해 조심하는 그다. 최재림은 목표로 세운 것보다 현재 위상이 어떤지 묻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다. 유령과 장발장을 50살 정도 됐을 때 했다면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라면서도 “항상 그 당시 나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했다”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배우지만 최재림은 자신의 영역을 뮤지컬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TV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앞으로는 연극과 영화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싶은 마음도 드러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 익숙해지고 지루해지기 마련이라 새로운 걸 하자 생각했다”라는 최재림은 “이제 넓혀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언제든 도전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라며 주가가 한층 더 높아질 앞날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