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조리 도구는 주방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조리 도구는 주방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입력 2021-02-10 16:24
수정 2021-02-11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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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
한때 가정에서 없어선 안 될 필수용품으로 여겨졌던 전설의 주방 도구가 있다. 얼마나 인기였냐면, 마치 반창고가 대일밴드가 되고 셀로판테이프를 스카치테이프로 부르듯 원래 이름인 핸드 블렌더(믹서기) 대신 ‘도깨비방망이’로 보통 명사화했을 정도다. 식재료를 자유자재로 손쉽게 갈아 버리는 도깨비방망이는 번거롭고 커다란 블렌더를 대체할 스마트한 존재로 각광받았다.

당시 많은 주부가 도깨비방망이를 구매했고 아이들은 쓰디쓴 녹즙이나 주스를 독립열사의 심정으로 삼켜야 했다. 다행히 비극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많은 도깨비방망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랍 한구석으로 조용히 유배됐다. 애초에 수프나 주스를 즐겨 먹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는 갈아 먹을 음식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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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곳곳에 놓인 다양한 조리 도구는 각각 존재의 이유를 갖고 능력을 뽐낸다.
주방 곳곳에 놓인 다양한 조리 도구는 각각 존재의 이유를 갖고 능력을 뽐낸다.
서랍에 잠자고 있는 게 과연 도깨비방망이뿐일까. 가득 찬 옷장에 입을 만한 옷이 없는 것처럼 주방엔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도구가 가득하지만 정작 음식을 하려면 쓸 만한 도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주방에 빼곡히 들어앉은 조리 도구는 왜 필요할까. 음식을 만드는 일, 즉 요리한다는 행위는 식재료를 변형시키는 일이다. 자르고 갈고 찢고 끓이고 찌고 튀기고 굽는 여러 행위를 거치면 하나의 음식이 완성된다. 도구는 요리 중 한 단계를 효율적으로 돕거나 여러 단계를 한번에 뛰어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를 덜 피곤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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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도구는 요리를 더욱 수월하고 다양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 디저트나 빵을 만드는 파티셰들에게 완벽한 결과물을 얻게 해 주는 필수 요소다.
조리 도구는 요리를 더욱 수월하고 다양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 디저트나 빵을 만드는 파티셰들에게 완벽한 결과물을 얻게 해 주는 필수 요소다.
고기에 곁들일 파채를 칼로 썰어 본 적이 있는가. 칼질에 능숙하다면 일도 아니지만 미끌거리는 파를 얇고 균일하게 많이 썰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채칼이 등장했다. 커터칼 같은 칼날이 여러 개 달려 있는 이 무시무시한 칼은 칼질 다섯 번 할 일을 한 번으로 단축시킨다. 채칼로 파를 서너 번 당겨 주면 고깃집에서나 봄 직한 얇은 파채가 완성된다. 식재료를 잘게 다져 주는 푸드프로세서나 온도 조절이 가능한 믹서기도 마찬가지다. 수십에서 수백 번 손이 가는 일을 버튼 하나로 해결해 준다.

이런 도구들은 사실 애교에 불과하다. 업장이나 호텔 주방에서 쓰는 오븐은 대개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오븐이 자동차 한 대 값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정한 온도에 다다르게 할 뿐만 아니라 센서를 이용해 알아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주고 자동으로 청소까지 한다. 이런 오븐이 있으면 일반 가정집에서도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놀랄 만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다. 도구가 요리에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크다.

조리 도구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지만 오히려 그 반대인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불필요한 도구 때문에 주방이 혼잡해지고 요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 의외로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집 주방을 정리하다 보면 ‘대체 내가 이걸 왜 샀지’ 자문하게 만드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올리브 씨 빼는 도구(씨 있는 올리브를 얼마나 자주 먹는다고)라든지 아보카도 슬라이서(아보카도를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는데), 삶은 달걀 슬라이서(삶은 달걀도 마찬가지), 파스타 계량기(정말 최악의 선택), 대나무 빨대, 가쓰오부시가 없어서 못 쓰는 가쓰오부시 대패와 생와사비가 없어서 못 쓰는 와사비 강판이 최근 발견한 전리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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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포장기는 음식 보관과 저온조리(수비드)에 유용하다.
진공포장기는 음식 보관과 저온조리(수비드)에 유용하다.
분명 도구 자체는 각 상황에 적절히 쓴다면 큰 효과와 기쁨을 줬을 테지만 평소의 라이프스타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있으면 언젠가 쓰지 않을까’란 안일한 생각으로 산 도구들은 결국 도깨비방망이와 같은 결말을 맞았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얻은 교훈은 한 가지 목적만 이룰 수 있는 도구라면 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거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사용할 자신이 없는 도구는 없어도 그만이다. 중식의 고수는 널따란 중식도 하나와 웍만 있으면 수백 가지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수천만원짜리 오븐과 채칼, 성능 좋은 블렌더가 있으면 지금보다 더 멋진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과연 그런 요리를 몇 번이나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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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용 오븐은 센서가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해 편리하게 요리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전문가용 오븐은 센서가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해 편리하게 요리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수많은 조리 도구의 존재 이유는 요리 노동의 해방이다. 매끼 벌어지는 식사 준비라는 전투를 효과적으로 치르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무기요, 고된 노동의 사슬을 끊어 낼 주방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좋은 도구는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시키고 어려운 요리를 쉽게 할 수 있게 돕는 건 물론 이전에 시도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게 해 더 풍요로운 식사 생활을 선사한다. 어디까지나 요리를 열정적으로 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2021-02-1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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