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에 정복된 영국인들은 염소 대신 돼지고기의 포로가 됐다

노르만에 정복된 영국인들은 염소 대신 돼지고기의 포로가 됐다

유용하 기자
유용하 기자
입력 2020-07-08 17:30
수정 2020-07-0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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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NA로 밝혀내는 고대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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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을 침공해 노르만 왕조를 연 ‘노르만 정복’은 영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연구팀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노르만 정복 이후 피지배민인 영국인들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제공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을 침공해 노르만 왕조를 연 ‘노르만 정복’은 영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연구팀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노르만 정복 이후 피지배민인 영국인들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제공
많은 사람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라고 하면 페도라를 눌러쓰고 낡은 크로스백을 멘 채 유물을 찾아 헤매는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린다. 19~20세기 초 활약했던 고고학자들은 인디아나 존스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유물을 찾아 자신의 나라로 가져가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현장 작업자 같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21세기에 활동하는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인공위성, 인공지능(AI), DNA 분석 같은 첨단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과학자에 더 가깝다. 발굴된 유물의 DNA를 분석해 혈연과 민족 간 연관 관계는 물론 집단이나 문화의 이동 경로를 정확히 밝혀내는가 하면 인공위성이나 항공기에 탑재된 레이저 관측장비로 땅속에 묻혀 있는 고대도시를 찾아내기도 한다. 로봇으로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대의 무덤이나 건물, 수중 난파선을 탐사한다. 또 수백만건의 고문서를 빅데이터로 바꾼 뒤 AI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해 과거의 모습을 사진처럼 그대로 복원해 내기도 한다. 이렇듯 첨단 과학기술은 고고학자, 역사학자의 상상력의 빈자리를 메워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과거를 보여 준다.

영국 셰필드대 고고학과, 카디프대 역사·고고학·종교학부, 브리스틀대 인류학·고고학과, 화학과,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 화학·약학과, 미국 스포캔원주민 보존연구센터 공동 연구팀은 영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으로 꼽히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일반인들의 생활사 변화를 처음으로 밝혀냈다고 8일 밝혔다. 지금까지 노르만 정복 이후에 대한 정보는 주로 귀족계급 같은 지배층에 관한 것이었고 실제 피지배민들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화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국 공공과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 6일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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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에서는 돼지 사육이 증가하면서 돼지와 닭의 소비량이 급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과학기술 덕분에 그동안 역사 속에서 빠져 있거나 설명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국 카디프대 제공
11세기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에서는 돼지 사육이 증가하면서 돼지와 닭의 소비량이 급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과학기술 덕분에 그동안 역사 속에서 빠져 있거나 설명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국 카디프대 제공
1066년 노르만 정복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정복왕)이 영국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을 침공해 노르만 왕조를 연 사건으로 영국사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팀은 옥스퍼드성 일대에서 발굴된 10~13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36명의 유골과 60여 마리의 동물 뼈에 대한 ‘안정 동위원소 분석’을 실시했다. 사람이나 동물은 평소 소비하는 음식에 대한 정보가 뼛속에 남게 되는데 이를 특정 동위원소로 분석해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를 파악하는 기술이 안정 동위원소 분석법이다. 연구팀은 당시에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각종 그릇의 파편에 남은 유기 잔여물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노르만 침공 이후 영국에는 표준화된 농법이 보급되고 염소고기나 우유 대신 돼지고기와 닭고기로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하게 됐으며 가축을 키울 때도 이전처럼 야채나 곡물이 아닌 음식물 찌꺼기를 줘 키우는 등 농업구조와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영국 요크대 역사학과 연구팀은 헨리 2세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에 의해 캔터베리 성당에서 살해당한 성 토머스 베켓(1118~1170)의 제단을 컴퓨터 영상합성기술(CGI)로 재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고 8일 밝혔다. 이 같은 복원 결과는 177년 전통의 영국 고고학협회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영국 고고학협회지’ 7일자에 실렸다.
CGI로 복원한 토머스 베켓의 제단
CGI로 복원한 토머스 베켓의 제단 영국 요크대 연구자들은 480여년 전 파괴된 영국의 성인 토머스 베켓의 제단을 인공지능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해내는데 성공했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역사학과 고고학은 관련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영국 요크대 존 젠킨스 박사 제공
캔터베리 트리니티 예배당 내에 있던 베켓의 제단은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를 선포하고 가톨릭교회들의 재산을 회수했던 1538년 일부 조각만 남기고 완전히 파괴됐다. 파괴 이전을 그린 그림이 없어 지금까지 학계와 가톨릭교회 측에서 여러 차례 복원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에 연구팀은 13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있는 참회왕 에드워드 제단과 엘리 성당의 성 에텔드레다 제단을 바탕으로 여러 문헌자료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성당 내 제단의 특징에 대한 빅데이터를 AI 알고리즘으로 처리해 복원했다.

벤 저비스 카디프대 교수는 “컴퓨터 알고리즘, AI, 동위원소나 DNA 분석 등 첨단 과학기술은 과거 특정 지역의 전염병이 어떤 경로로 확산됐는지, 경제적 환경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등 역사적 사실들을 마치 사진이나 신문을 읽듯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2020-07-0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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