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현 한국 적석총서 영향” 밝혀져/「일서 생겨나 한국으로 역류」 주장에 쐐기
한일학계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전방후원분의 시원문제가 최근 발굴된 일본 나라현(나양현)텐리시 나카야마고분(중산대총·서울신문 10월26일자 21면)으로 인해 일단락되게 됐다.발굴주체인 나카야마고분조사 위원회가 이 고분이 한국의 돌무지무덤(적석총)영향을 받아 축조된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전방후원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일본학계가 나카야모고분의 원형을 고대 한국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이유는 무덤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는데 있다.네모꼴의앞쪽 전방부와 둥근 봉우리꼴의 후원부를 합해 길이 1백22m,최대 너비 62m나 되는 이 전방후원분은 후원부 봉우리 꼭대기를 빼고 모두 돌을 채웠다.
일본 학계는 이 나카야마고분을 일본 전방후원분의 초기형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저절로 생겨난 자생의 무덤이 아니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에서 건너온 돌무지무덤 양식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일본 학계는 나카야마고분의 시원지역을 꼭집어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우리 국내학계는 압록강과 그 지류 유역에 무수히 분포한 돌무지 무덤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에 돌무지무덤이 밀집한 지역은 오늘날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자강도에 속하는 평북 자성군 운평리와 초산군 송암리.압록강유역인 운평리에서 2백여기,압록강지류 자성강유역 송암리에서는 1백50여기의 돌무지무덤이 지금까지 조사되었다.이가운데 운평리 4지구 6호무덤과 송암리 88호 및 106호무덤은 강돌 등을 쌓아 축조한 전방후원분 형태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일본 학계는 이번 발굴을 계기로 나카야마고분이 위치한 지역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있다.텐리시는 3세기쯤 고대 일본의 야마타이(사마대)왕국이 있었다는 긴키(근기)지방인데다 뒷날 국가통일을 이룩한 야마토(대화)정권과도 무관치않기 때문이다.그리고 일본인 학자 오츠카 하츠시게(대총초중·명치대교수)는 나카야마고분 발굴의 뜻을 「초기 일본의 능묘구조와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획기적 자료」라는 말로 평가했다는 것이다.일본 초기의 능묘구조는 물론 압록강 유역의 돌무지 무덤 영향이다.
따라서 국내 학계의 여론은 나카야마고분을 통해 야마토정권 창출배경이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쏠렸다.
어떻든 나카야마고분 발굴은 일본의 전방후원분 자생설을 잠재우게 되었다.그리고 한국의 전방후원분이 일본에 비해 숫자가 적고,출토유물의 시대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나온 역류설 역시 사라질 전망이다.<황규호 기자>
한일학계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전방후원분의 시원문제가 최근 발굴된 일본 나라현(나양현)텐리시 나카야마고분(중산대총·서울신문 10월26일자 21면)으로 인해 일단락되게 됐다.발굴주체인 나카야마고분조사 위원회가 이 고분이 한국의 돌무지무덤(적석총)영향을 받아 축조된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전방후원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일본학계가 나카야모고분의 원형을 고대 한국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이유는 무덤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는데 있다.네모꼴의앞쪽 전방부와 둥근 봉우리꼴의 후원부를 합해 길이 1백22m,최대 너비 62m나 되는 이 전방후원분은 후원부 봉우리 꼭대기를 빼고 모두 돌을 채웠다.
일본 학계는 이 나카야마고분을 일본 전방후원분의 초기형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저절로 생겨난 자생의 무덤이 아니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에서 건너온 돌무지무덤 양식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일본 학계는 나카야마고분의 시원지역을 꼭집어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우리 국내학계는 압록강과 그 지류 유역에 무수히 분포한 돌무지 무덤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에 돌무지무덤이 밀집한 지역은 오늘날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자강도에 속하는 평북 자성군 운평리와 초산군 송암리.압록강유역인 운평리에서 2백여기,압록강지류 자성강유역 송암리에서는 1백50여기의 돌무지무덤이 지금까지 조사되었다.이가운데 운평리 4지구 6호무덤과 송암리 88호 및 106호무덤은 강돌 등을 쌓아 축조한 전방후원분 형태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일본 학계는 이번 발굴을 계기로 나카야마고분이 위치한 지역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있다.텐리시는 3세기쯤 고대 일본의 야마타이(사마대)왕국이 있었다는 긴키(근기)지방인데다 뒷날 국가통일을 이룩한 야마토(대화)정권과도 무관치않기 때문이다.그리고 일본인 학자 오츠카 하츠시게(대총초중·명치대교수)는 나카야마고분 발굴의 뜻을 「초기 일본의 능묘구조와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획기적 자료」라는 말로 평가했다는 것이다.일본 초기의 능묘구조는 물론 압록강 유역의 돌무지 무덤 영향이다.
따라서 국내 학계의 여론은 나카야마고분을 통해 야마토정권 창출배경이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쏠렸다.
어떻든 나카야마고분 발굴은 일본의 전방후원분 자생설을 잠재우게 되었다.그리고 한국의 전방후원분이 일본에 비해 숫자가 적고,출토유물의 시대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나온 역류설 역시 사라질 전망이다.<황규호 기자>
1994-10-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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