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길들이는가
아날로그 시대가 막을 내리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到來)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아날로그적 기억들은 썰물처럼 지워져간다.이러한 지경이니 누군들 난처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디지털의 편리함 뒤로 정보노출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감시받는 시대. 현재 미국에선 음주운전자들이 스마트폰 정보를 이용해 음주단속을 피해간다고 한다. 그야말로 양손에 칼과 방패를 들고 필요에 따라 불법을 자행하고 또는 상대를 공격하고 이용하는 문명의 이기이며 모순된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그야말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이지만 어둠의 둥치가 더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가 크면 클수록 그늘이 커지듯이 문명이 발달될수록 그늘에 가려 어둠에 방치되는 사각지대가 늘어난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우리의 삶 깊숙이 족쇄를 채워오는 팬옵티콘(panopticon)의 시대가 도래(到來)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기계음 모닝콜로 하루를 시작하고 원터치로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해결되는 지금, 사람과의 접촉보다 기계와의 접촉이 더 많은 시대, 문자를 통해 간단한 대화를 하고 신조어가 만연한 시대,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한글이 형편없이 망가져 가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정서마저 메말라가고 기계적이 되어 간다. 마음을 전달하는 능력은 점점 떨어져가고 있다. 기계와 대화하고 기계에게 묻고 스스로 사고하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기계에게 의지하고 기계를 믿고 그러다 계기고장이 오면 수족이 묶인다. 이런 상태가 오래간다면 사고력은 물론 기억력도 떨어져 기계의 도움 없이는 무능력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스마트폰이 고성능이라 해도 기계는 기계일 뿐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이 기계를 만들고 길들여가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인간이 점점 기계에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상상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날로그 시대엔 서로의 마음을 편지라는 방식을 통해 전달했다. 조금은 더딘 것 같지만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고 그리움과 인내를 배울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사고하고 되짚어보는 사색하는 시간들을 즐기곤 했다.
많은 정서적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하는 시대, 특히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의 차이는 엄청날 것이고 점점 스마트폰을 사용할 줄 모르는 노년층의 설자리는 좁아지고 소외되어 가는 무서운 결과가 오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부모와 자식지간에도 대화가 모자라고 소통이 없어 불협화음이 큰데 소통을 위한 스마트폰이 오히려 소통의 간격을 더 크게 벌려 놓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된다.
흐르는 물결을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모든 편리함 뒤에 숨은 부작용 앞에서 우리는 너무 안이하고 무심하게 대처하고 도리어 디지털의 흐름에 밀려 딸려가고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장단점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글_ 최준영 대림대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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