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어 가는 세계의 샛별] 피아니스트 조성진
연초에 피아노 음악에 미친(?) 일본 음악평론가 사토루 다카쿠 씨가 연하장과 함께 잡지 한 권을 보내왔다. “제 생각에 지금 한국은 재능 있는 영 피아니스트들의 위대한 나라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일본 《Chopin Magazine》 2010년 1월호였다.1월호의 특집 1은 “한국세,대분류!(韓國勢,大奔流!) 개성의 격돌(個性의 激突!) 개성의 경연(個性의 競演) 제7회 하마마츠 국제 피아노 콩쿠르 사상 최연소 우승자 탄생, 조성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반가운 건 특별부록으로 곁들어 있는 하마마츠 콩쿠르 DVD였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15세의 나이로 기라성 같은 전 세계 피아노 치는 형, 누나들을 모두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조성진에 대한 관심은 일본 클래식 음악계에서 극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우승을 차지한 조성진뿐만 아니라 3위 허재원, 5위 김현정, 6위 안수정까지 이 세계적인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 피아니스트들이 완전 싹쓸이 석권을 했고, 2010년 현재 한국이 진정 국제 피아노계의 강국으로 우뚝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사건이었다.
조성진은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1위, 일본인 작품 최우수 연주상, 삿포로 시장상 이렇게 모두 3개의 상을 받았다. 서초동 ‘모차르트 홀’에서 서울예고 학기 초 입학실기 시험을 치르고 온 조성진을 만났다.
“쇼팽은 제가 무척 편하게 칠 수 있는 작곡가에요. 그리고 사람들도 제가 쇼팽을 치면 좋아하죠. 손이 잘 붙는달까요. 리스트도 그렇구요. 쇼팽하고 리스트를 더 잘 치고 편해하지만 사실은 바흐, 베토벤, 브람스 3B를 더 좋아해요.” 낭만적 레퍼토리를 더 잘 치고 편해하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는 독일 작곡가들이라고 하는 이 소년. 언젠가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가장 잘 친다고 스스로 자부할 때가 오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쇼팽 국제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처음 출전했을 때 러시아 친구들 손가락이 돌아가는 걸 보고 무척 놀라서 정말 부지런히 테크닉 연습을 했었는데 하마마츠에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주위 환경이 전혀 욕심을 부리지 못하도록 했는데 왜냐하면 큰 성인들, 형 누나들이 많이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이 하마마쓰에서 우승하게 된 비결이었다.
“2008년에 예원중학교 실기시험 때 등수 잘 나오려고 열심히 했는데 그때 신수정 선생님께서 ‘욕심 부리지 마라. 욕심이 있는 게 너의 음악에서 다 나타난다’고 하셔서 그때 깨달음이 있었어요.”
원래 조성진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아니스트 박숙련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친구들 선생님 중에는 정말 꾸중을 많이 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신데 박숙련 선생님은 전혀 꾸중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제일 큰 꾸중이 ‘오늘 연습이 안 되어 있구나’정도였어요. 신수정 선생님도 꾸중을 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피아노를 치면서 한 번도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심하게 혼나 본 적도 없구요. 두 선생님이 모두 자연스럽게 음악이 우러나게 스스로 할 수 있게 도와 주셨어요.”
조성진은 호흡이 길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부끄러워하는 편인데 무대 위에서는 타고난 배짱도 있다. 게다가 지난 1월에 있었던 모차르트홀에서의 경이로운 독주회를 듣고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 연습한다는 말이 있죠.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기부터 꼭 합니다. 제가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런 모습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루빈슈타인이나 호로비츠처럼 나이 들어서도 오래 평생 동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조성진. “피아노를 오래 치면 시간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늘 좀 더 크게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성진은 결코 일찍 피아노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고, 7세 때부터는 바이올린을 배워 6학년 때까지는 똑같이 공부를 했다. 바이올린은 늘 반주가 있어야 했지만 피아노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피아노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콩쿠르 역사는 7세 때부터 시작된다. 처음 동네 콩쿠르에 나갔는데 피아노는 떨어지고 바이올린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재미있지 아니한가?
바이올린을 더 좋아했었고 바이올린을 하는 친구들도 좋아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 바이올린은 서서 연습해야 하는 것이 힘들어서 피아노를 택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는 조성진. 지금도 피아노가 노래하는 것보다 바이올린이 노래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 한다. “역시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것은 다르죠?” 조성진의 말이다.
조성진이 존경하는 명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노래하는 걸 배우기 위해 피아노 음반을 들은 것이 아니라 성악 음반만 들었다고 하는데 조성진은 과연 어떨까?
“저도 호로비츠가 성악 CD를 즐겨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직 제 CD 중에는 성악 CD가 없어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최근에 들었죠. 신수정, 박흥우 두 분의 연주로요. 교향곡도 좋아하구요, 말러 3번 같은 건 어렵지만 말러 1번은 좋아해요. 클래식 음악은 모든 장르를 다 좋아하는데 록 같은 다른 장르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본인이 생각하는 장점에 대해 묻자 “장점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를 믿는 것 중에 하나는 집중력이 좋다는 거에요. 한번 하면 집중력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치고 그 다음에 많이 쉬고 이런 게 제 스타일이죠. 그렇지만 피아노에 대해서는 쉴 때도 계속 생각하죠.”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와 아티스트들에 대해서 물었다. “시간마다 음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늘 다른 관점을 갖게 되지만”이라고 운을 뗀 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주로 거장들, 베토벤 연주는 에밀 길렐스와 빌헬름 켐프, 바흐 평균율 피아노 곡집은 에드윈 피셔, 쇼팽은 루빈슈타인의 연주를 좋아해요.”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도 좋아한다. 특히 루간스키는 모스크바에서 고연을 보고 만나본 후 더 반하게 되었다고, 그의 연주와 매너 모두 본받을 만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다니엘 바렌보임 책을 읽고 있는데 두루 잘 할 수 있고 성격도 마음도 넓은 점이 존경스러웠다고 한다. 그럼 ‘롤 모델’은 누구일까?
“장한나 누나요. 전 낯을 가리는 편인데 누나는 사교성도 좋고 본받을 점도 많아요. 지휘까지 하는 걸 보고 반했어요. 가끔 장한나 누나와는 이메일도 주고받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아요.” 그뿐만이 아니다. 선배 피아니스트들인 김선욱, 손열음과도 친하다. 김선욱 형과는 얼마 전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함께 치면서 연습했고, 손열음 누나와는 콩쿠르 때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먼저 스타덤에 오른 한국의 자랑스런 두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조성진을 이끌어주고 있는 모습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로 조성진의 공연 스케줄은 매우 바빠졌다.
우승 부상으로 앞으로 4년 동안 일본에서 공연을 계속 갖게 되는데 우선 3월 12일 ‘도쿄 오페라 시티 독주회’가 있고 13일에는 이바라키현 분코에서 직접 렉쳐 콘서트도 하게 된다. 16일 토쿄 카와이홀에서 독주회가 있고, 18일에는 나고야에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협연, 21일에는 하마마츠에서 독주회가 있다. 이번 일본 독주회에서 난생처음으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할 예정인데 무소르그스키의 천재성이 느껴진다고.
3월 30일에는 박은성이 지휘하는 코리안 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예술의전당에서 협연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 공연에서도 연주하는데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할 예정이다. 7월 1일에는 하마마츠 95주년을 맞아서 콘서트 때 한 곡을 연주하며, 7월에는 일본 NHK심포니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8월에는 PMF페스티벌이 열리는 홋카이도에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 11월 하마마츠 심포니 협연까지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일본 클래식 공연의 청중들이 수준이 높고 저변이 매우 넓은 것이 연주할 때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4월에는 모스크바 쇼팽 청소년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이었던 니콜라이 페트로프의 초청으로 전통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볼쇼이잘에서 독주회와 협연을 갖게 되는데 레퍼토리는 리스트의 <저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슈만의 <유모레스크>다.
이렇게 꽉 찬 일정을 갖고 있는 조성진. 쉬는 시간은 있는지 궁금했는데,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가끔은 헬스장에 가서 체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도 하면서.
조성진에게 앞으로 꼭 연주하고 싶고 레코딩하고 싶은 레퍼토리를 물었다. “슈베르트 즉흥곡 전곡 연주입니다. 라두 루푸의 연주를 가장 좋아하는데 이 곡은 꼭 젊은 시절에 연주와 레코딩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도 연주하고 싶은데 30대, 40대로 가면서 자신이 어떻게 이 곡을 연주하면서 달라지는지도 알고 싶다고 한다.
“청중을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조성진. 앞으로의 긴 피아노 여정 속에서 늘 이 말을 실천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글_ 장일범 음악평론가, KBS클래식FM 생생클래식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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