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쓴소리 날린 ‘진정한 보수주의자’ 조지훈

현실에 쓴소리 날린 ‘진정한 보수주의자’ 조지훈

손원천 기자
손원천 기자
입력 2024-05-03 00:29
수정 2024-05-0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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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평전/김삼웅 지음/지식산업사/316쪽/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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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문단의 변절 회오리에 실망해 오대산으로 들어가 청절하게 살아가던 청년 조지훈(1920~1968)은 일제가 싱가포르를 접수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암혈(岩穴)의 노래’라는 시를 짓는다.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별과 달이 부서진 샘물을 마신다./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창이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쫓겨 왔으나/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기에/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꿈이여 오늘도 광야를 달리거라/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문학에 아둔한 이라도 나라 잃은 젊은이의 비분강개를 단박에 느낄 수 있는 시다.

조지훈 하면 청록파 시인, ‘승무’ 등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서정시인 등의 수식어가 퍼뜩 떠오른다. 관점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조지훈이 보인다. 정치·사회 현실의 벽 뒤로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 말이다. ‘조지훈 평전’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 시인 조지훈의 삶을 톺아본 책이다. 자유당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고 4·19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던 지식인 조지훈에게 집중했다.

조지훈은 1960년 ‘새벽’이란 잡지에 ‘지조론’이란 글을 쓴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영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이 글이 발표된 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가 일어나기 직전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를 때다. 그러니까 다들 몸조심, 입조심하기 바쁠 때 그는 이런 글을 쓴 거다.

4·19 혁명이 잠시나마 민중의 승리로 끝났을 때도 그는 몸담고 있던 고려대 교지에 이런 글을 남긴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아/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어둠 속에 멀리 간 수탉의 넋들아/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이 헌시는 지금도 4월 혁명의 대표시 중 하나로 꼽힌다.

저자는 조지훈을 “격동기 학자 지식인의 전범”이라고 평한다. 아울러 그로 대변되던 개혁적 보수주의의 흐름이 끊어진 건 한국 보수의 불행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알고 행하는 ‘보수적 개혁파’였다. 한국적 보수가 ‘수구’와 동의어가 되는 현실에서 조지훈 선생과 같은 개혁 보수의 정신과 행보는 너무 값지다.”

2024-05-0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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