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학문용어 자국화했던 니시… 日 노벨상 이끈 근대어의 탄생

서양 학문용어 자국화했던 니시… 日 노벨상 이끈 근대어의 탄생

유용하 기자
유용하 기자
입력 2023-03-10 01:03
수정 2023-03-10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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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야마모토 다카미쓰 지음/지비원 옮김/메멘토/568쪽/3만 5000원

1800년대 계몽사상가 니시 아마네
“진리 아는 사람은 日고유 문장 써야”
영어 한마디도 못해도 학문 이해 가능
결국 2008년 日물리학자 3명 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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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산업대 명예교수가 그해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기념 강연을 하는 장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그의 모습은 언어가 아니라 개념을 얼마나 명확히 아느냐가 성과의 바탕이 된다는 걸 보여 준 사례로 꼽힌다. 노벨재단 제공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산업대 명예교수가 그해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기념 강연을 하는 장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그의 모습은 언어가 아니라 개념을 얼마나 명확히 아느냐가 성과의 바탕이 된다는 걸 보여 준 사례로 꼽힌다.
노벨재단 제공
2008년 노벨물리학상은 여러모로 화제였다. 일본 물리학자 3명이 공동 수상한 데다 수상자 중 한 명인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산업대 명예교수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마스카와 교수는 노벨상 수상기념 강연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했다.

영어를 못하고도 노벨과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학문이란 해당 분야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우선이라는 분위기와 외국어를 모르더라도 최신 연구 현황을 빠르게 알 수 있었던 환경 덕분이다.

일본이 비서구권 국가 중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이유를 찾으려면 메이지유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본은 ‘오야토이’라고 불린 외국 과학자들을 불러 학생들을 교육했다.

이 학생들은 졸업 후 외국 유학을 떠나 선진 학문을 공부한 뒤 귀국해 유학을 가지 않아도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독자적인 학문 전통을 확립시켰다. 동시에 메이지 정부는 정책적으로 각종 용어를 일본어로 바꾸고 주요 서적을 번역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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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학문을 한자어로 번역해 동아시아 지역에 확산시킨 19세기 일본 계몽주의자 니시 아마네. 위키피디아 제공
서양 학문을 한자어로 번역해 동아시아 지역에 확산시킨 19세기 일본 계몽주의자 니시 아마네.
위키피디아 제공
이 책은 일본이 서양 학문용어 번역에 열을 올리던 시기를 살았던 계몽사상가 니시 아마네(1829~1897)가 쓴 ‘백학연환’이라는 문서를 바탕으로 학술용어의 수입, 번역, 발전 과정을 꼼꼼히 살핀다. 우리에게 니시 아마네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지만 ‘사이언스’를 현재 우리도 쓰고 있는 ‘과학’으로 번역한 사람이라고 하면 귀가 쫑긋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술, 기술, 예술, 연역법, 귀납법, 심리, 체계, 이론 등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흔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학문 분류나 용어의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이 책에서 다룬 ‘백학연환’은 1870년 니시가 서구 학문을 제자들에게 쉽게 소개하려고 한 강의 내용을 담은 일종의 강의록이다. 백학연환도 요즘 백과사전으로 번역되는 ‘인사이클로피디아’(encyclopedia)를 니시가 옮긴 단어다. 인사이클로피디아의 어원은 그리스어 ‘엔큐클리오스 파이데이아’이다. 풀어 보면 어린아이를 바퀴 안에 넣어 교육한다는 의미를 한자어 백학연환(百學連環)으로 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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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가 당시 일본인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 지식인의 기초교양이었던 유학에도 정통했기 때문이다. 그가 ‘필로소피’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는 11세기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통서’에 나오는 ‘선비는 현명함을 사랑하고 희구한다’(士希賢)를 참고했다. 이를 ‘현철함’과 연결해 ‘희철학’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희’가 떨어져 ‘철학’이라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니시가 서양 학문용어를 자국화하는 데 열을 올렸던 이유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일본 고유의 문장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진리가 일본을 서구 열강의 압박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책을 읽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가장 과학적인 글자 ‘한글’을 갖고 있음에도 번역 문화가 척박하고 어려운 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국산화하려는 노력 대신 국제화라는 명분으로 영어 몰입교육을 하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2023-03-1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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