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어떤 점이 세계유산 가치 인정받았나

남한산성, 어떤 점이 세계유산 가치 인정받았나

입력 2014-06-22 00:00
수정 2014-06-2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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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도시계획과 축성술의 교류를 보여주는 군사유산”

세계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가 채택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기초를 둔다. 세계유산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 유산을 대상으로 한다. 이를 크게 자연이 빚어낸 자연유산(natural heritage)과 인류 활동의 흔적인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 그리고 이 두 가지 성격을 복합한 복합유산(mixed heritage)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문화유산이다.

한데 세계유산이 되기 위한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 협약에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률 체계로 보면 헌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조건은 ‘세계유산협약의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Operational Guidelines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World Heritage Convention)에서 규정한다. 이 가이드라인은 자주 바뀌는 편이다.

가이드라인이 규정한 세계유산의 조건은 ▲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 진정성(authenticity) ▲ 완전성(integrity)의 세 가지다. 하지만 이 또한 추상적인 까닭에 가이드라인은 그것을 더욱 세밀하게 10가지로 구체화한다. 10가지 중 6번째까지가 문화유산과 관련되며,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유산과 관련 사항이다. 이 세부 조건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해야 세계유산이 된다.

세 가지 조건 중에서도 흔히 유네스코에서는 ‘OUV’로 약칭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 이에 기초해 유네스코가 정의한 6가지 문화유산 등재조건은 다음과 같다.

(i) 인류의 창조적인 천재성이 만들어낸 걸작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

(ii) 인류의 중요한 가치 교류를 보여주는 건축이나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이나 조경설계의 발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거나 세계의 특정 문화권에서 일어난 것 .

(iii)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

(iv)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들)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특정 유형의 건조물,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이거나 경관.

(v) 문화(또는 여러 문화) 또는 돌이킬 수 없는 영향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큰 환경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전통적인 인간 정주지, 토지의 이용 또는 해양의 이용과 관계되는 탁월한 사례에 속하는 것.

(vi)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 또는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앙, 예술ㆍ문학 작품과 직접적으로 또는 형태적으로 연계된 것.

국내 11번째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남한산성은 이 중에서도 (ii)와 (iv)를 충족했다.

등재 기준 (ii)에 따라 남한산성은 “동아시아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의 군사유산”으로 간주되었으며 (iv)에 따라서는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한 초대형 포곡식 산성”으로 평가된 것이다.

최재헌 건국대 지리학과·세계유산학과 교수에 의하면 남한산성은 등재기준 (ii)에 따라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에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1592~1598)과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7)을 거치면서 국가 유사시에 왕실과 조정의 보장처로 방어력을 갖춘 임시수도의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라 등장한 산성도시로서 새로운 화포와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성곽을 증·개축하고, 다양한 중국의 방어전술을 응용해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남한산성은 그 자체 독특성을 지니면서도 세계사, 특히 당시 동아시아 사회와 교류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등재기준 (iv)와 관련해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기술적 발달 단계와 무기체제의 변화상을 잘 나타낸다고 평가받았다.

남한산성은 그 원류를 찾아가면 나당전쟁 거점 중 한 곳인 통일신라시대 주장성(672년)에 닿는다. 실제 남한산성에서는 주장성 흔적이 발굴결과 드러났다. 그러다가 1624년 인조 때는 전통적인 퇴물림 방식에 따라 정방형과 장방형 돌을 20단 이상 쌓아 옆에서 보면 하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직선에서 뒤로 굽어지는 굽도리 방식의 형태의 남한산성으로 탈바꿈한다. 화포 공격에 대비해 하단에는 대형 석재와 암반을 사용해 성벽의 지지력을 높여 화포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영조와 정조 때는 석재 중간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성벽의 지지력을 더욱 높인다. 성벽과 옹성에는 불랑기 등의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포좌를 만들고 옆에 화약고를 만든 포대를 건설했다. 또한 여장을 만들면서 마사토와 강회, 동유를 섞은 모르타르와 전돌을 함께 사용해 구조적인 지지력을 높였고, 근총안과 원총안을 만들어 적에게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변모에 따라 남한산성은 성벽이 시기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인조 초에 축성한 원래 성, 병자호란 이후에 만든 3개 외성, 그리고 5개 옹성과 방어시설 등은 축성술이 변모한 흔적을 고스란히 반영한 화석과 같은 유산인 셈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고려되기는 했지만, 남한산성은 결국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했다 해서 국내 11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물론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경기도가 보여주는 보존정비 정책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기도는 산성 내 러브호텔을 철거했는가 하면, 무분별한 식당가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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