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부터 ‘은밀하게’까지, 캐릭터에 남북관계·시대상 투영
계단에서 굴러 넘어지는 것이 다반사인 동네 바보 방동구. 툭하면 동네 꼬맹이들에게 짱돌을 맞으며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인 동구가 실은 북한 최정예 요원이었다고?배우 김수현이 바보 임무를 띠고 남파된 북한 엘리트 요원으로 활약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연일 한국영화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김수현의 ‘스타 파워’와 원작 웹툰의 힘이 영화 흥행의 가장 큰 요소로 꼽히지만, 영화의 소재가 된 ‘간첩’과 분단 현실이 중장년층 관객까지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는 요인 중 하나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돌이켜보면 ‘간첩’은 늘 한국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됐다.
자칫 민감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영화 속 ‘간첩’은 때로는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때로는 유쾌하게 현실을 비틀며 분단 현실을 담아냈다.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간첩에 대한 달라진 인식도 영화에 반영됐다.
◇ 분단의 아픔 그린 ‘쉬리’부터 ‘베를린’까지 = 냉전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다룬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가 등장할 당시만 해도 남북 분단 현실을 다루는 것은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었다.
’쉬리’는 북한의 최고 저격수로 남한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이방희(김윤진 분)와 남한의 비밀요원 유중원(한석규)의 비극적인 사랑을 액션과 버무린 영화. 당시로써는 최고인 62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한석규가 또다시 첩보원으로 분한 ‘이중간첩’(2003)은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이었던 80년대를 배경으로, 남파된 이중간첩(한석규)과 남한 내 연락책인 고정간첩(고소영)과의 이룰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그려냈다.
첫 천만 관객을 동원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2003)는 베일에 싸여 있던 북파 간첩의 모습을 조명해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올해 초 개봉해 7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영화 ‘베를린’은 하정우·한석규·류승범·전지현 등이 출연해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남북한 첩보원들이 음모와 의심으로 서로 쫓는 등 생존을 향한 미션을 그렸다.
◇ 아예 코믹하거나 ‘생활형’이거나 = ‘쉬리’가 개봉한 지 불과 3개월 뒤에 나온 장진 감독의 ‘간첩 리철진’은 간첩을 소재로 한 코미디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남한에서 개발된 슈퍼돼지 유전자의 샘플을 입수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남파된 리철진(유오성)이 간첩답지 않은 어수룩한 면 때문에 택시 강도를 만나는 등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렸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2004)도 아예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워 타고난 미모와 지성, 날렵한 무술까지 겸비한 북한 간첩 림계순(김정화)이 거액의 공작금을 가지고 사라진 동료를 잡고자 남파됐으나 눈치 없는 삼수생 최고봉(공유)과 얽히며 벌어지는 소동을 다뤘다.
이후 등장한 영화 ‘의형제’(2010)는 코미디는 아니지만 그동안 유연해진 남북 관계를 반영하듯 각자 조직에서 버림받은 국정원 요원(송강호)와 엘리트 남파 공작원(강동원)이 서로 이해하며 다가가는 이야기를 유머와 함께 담아 호응을 얻었다.
’생활고’를 지닌 남파 간첩들의 얘기를 그린 ‘간첩’(2012)도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이 된 남파 간첩들이 오랜만에 내려진 ‘귀순 간부 암살’이라는 임무보다 귀순 대가로 받았을 돈을 훔치는 데 머리를 맞대는 내용이다.
◇”바뀐 사회 분위기 반영”…차기작 대기중 = 민족의 분단에서 비롯된 ‘간첩’이라는 존재가 한국 영화의 흥미로운 소재 중 하나라는 점은 여전히 가슴 아픈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장철수 감독은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남북 분단으로 가장 피해받는 것은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며 분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이런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꽃미남 배우’가 간첩 역으로 분하거나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향을 보인다. 그만큼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연해졌음을 방증한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속 북한 최정예 요원 원류환(김수현)도 결국은 어머니의 안부를 걱정하는, “평범한 나라에 평범한 집에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서 계속 평범하게 살다 죽는” 것을 꿈꾸는 인물이다.
투자배급사 쇼박스 최근하 홍보과장은 10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분단 현실이나 간첩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며 “젊은 층으로 내려올수록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잇달아 개봉을 준비 중이다.
공유가 북한에서 버림받고 남한에서 대리운전을 하며 사는 전직 북한 특수부대 출신 용병을 맡은 영화 ‘용의자’는 최근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이 진행 중이다.
여동생을 살리려고 남한에 침투해 킬러로 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명훈(최승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동창생’도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