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 보수는 “금세기 최대의 석탑수리”

석가탑 보수는 “금세기 최대의 석탑수리”

입력 2012-09-27 00:00
수정 2012-09-2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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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톤짜리 몸돌도 해체..”지반조사는 발굴조사될 수도”

27일 본격적인 닻을 올린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해체 복원 사업을 지휘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 배병선 단장은 이 사업이 “금세기 최대의 석탑수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사업 규모가 클 것이라는 예고다.

석가탑은 한국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하나라는 상징성이 무엇보다 크지만, 언뜻 그 규모가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담한’ 듯한 이 석탑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재로만 보면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상·하 2단으로 구성된 기단 위를 장식한 탑신부 각층은 각각 하나의 몸돌과 하나의 옥개석(지붕돌)으로 구성된다. 그 무게를 보면 1층은 몸돌이 7.7t에 옥개석이 7.1t에 육박한다.

배 단장은 “석가탑보다 전체 규모가 큰 석탑은 더러 있지만 이보다 더 큰 석탑 부재는 없다”고 말했다.

2층 부재 또한 만만치 않아 몸돌이 2.6t에 옥개석 6t이며, 3층은 몸돌 1.1t에 옥개석 3.4t이다. 이런 탑신부에서 상륜부로 이어지는 부재인 노반은 0.5t이다.

이를 탑신부와 그 아래 기단 부재는 10t짜리 크레인으로 하나하나 해체한다.

이 정도 크레인은 불국사 대웅전 권역을 감싼 회랑을 파괴하지 않고는 들여놓기도 쉽지는 않았지만 세 차례 걸쳐 회랑 위로 옮기는 모험을 감행해 설치했다.

나아가 이번 해체 복원은 석가탑 전체를 드러냈다가 다시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 여타 석탑 해체 복원과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배 단장은 강조했다. 그가 이번 사업을 “금세기 최대의 석탑수리”로 부르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또 하나 이번 사업에서 주의할 대목은 석탑 아래 기단에 대한 사실상 발굴조사가 유력시된다는 사실이다.

배 단장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단까지 드러낸 다음 지반을 발굴하게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2008년 일부를 해체 복원 완료한 다보탑은 “기단이 상대적으로 안정됐다는 판단에 따라 밑은 손을 대지 않았지만 석가탑은 기단이 상대적으로 더 불안하다는 안전진단 결과가 있어 지반 조사를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고 전망했다.

지반의 발굴조사는 뜻밖의 성과를 낼 수도 있다.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 여타 탑을 발굴하면 기단 주변으로 적지 않은 공양품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백제 창왕 때 건립한 부여 왕흥사 터의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는 무수한 공양품이 쏟아졌다.

해체 복원이 목적이었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예상치도 못한 사리장엄 일괄 유물이 발견되는 바람에 사업 전체 공정이 1년가량 늦어지기도 했다.

석가탑 해체는 이미 1966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과 비교할 때 당시의 수리는 절반 정도만 손댄 데 지나지 않았다.

당시 석탑 내부에 있는 사리장엄을 겨냥한 도굴 시도가 실패가 돌아갔지만, 이 과정에서 석탑 부재가 일부 틀어지는 등의 피해를 본 것을 계기로 해체 복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해체 수리는 한창 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발생한 ‘사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즉, 사리장엄을 안치한 사리공에 도달하고자 들어 올리던 2층 옥개석이 곤두박질 치고 만 것이다. 이 과정에서 2층 옥개석이 피해를 보았다.

이에 놀란 당시 해체작업단에서는 그 상태서 서둘러 사태를 봉합하고자 추가 해체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그대로 복원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한편 가설덧집 층계시설을 통해 바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탑 상륜부는 1970년에 복원한 부분과 원래의 석탑 경계선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1916년 ‘조선고적도보’라는 책자에 실린 석가탑 사진을 보면 이미 이 당시에도 석가탑은 연꽃이 위를 쳐다보는 모양의 장식인 앙화(仰花)까지만 남았고, 그 상부는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사라진 상륜부를 1970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모델은 건립 연대나 석탑 양식이 석가탑과 비슷한 남원 실상사 석탑의 상륜부였다. 그러므로 앙화 윗부분은 석가탑의 원형은 아닌 것이다.

한데 새로 복원한 부분은 원래의 석탑 부재와는 색깔부터가 확연히 달라 상대적으로 흰색이 많았다.

원래의 석가탑 최상층인 앙화에는 네 면 각 모서리와 그 중간 하나씩 총 8개를 배치한 가릉빈가 문양이 확연히 보였다.

이번 해체복원 자문위원이기도 한 소재구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은 “이런 가릉빈가 문양은 오늘과 같은 기회가 아니면 실감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체 복원과 더불어 석탑에 대한 각종 연구도 다각도로 진행한다. 그 일환으로 석탑 부재를 어디에서 캐 왔는지를 구명하는 작업도 한다.

배 단장은 “다보탑을 보면 몸돌 같은 큰돌은 (경주) 남산의 화강석을 썼으며, 난간은 감은사지가 있는 장항 쪽에서 온 것으로 추정됐다”면서 “같은 시기에 만든 석가탑도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은 하지만 정확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해체 복원에는 총 30억 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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