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재협상의 본보기 NAFTA “종료 협박하다 의회초안에선 완만한 수정 요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끔찍한 협상이라며 재협상을 넘어 종료 가능성까지 들고나오면서, 이런 언급이 진의인지 ‘미치광이’식 협상전략의 일환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아직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한미 FTA 재협상 내지 종료 관련 공식 통보를 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취임 100일을 맞아 모든 FTA 협정의 재검토를 명령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해 사실상 재협상을 기정사실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 1월 23일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잠재적 참사’로 규정하며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최근에는 취임 100일을 맞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종료하는 행정명령 서명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대통령 등 상대국 정상을 비롯한 안팎의 전방위적 만류로 먼저 재협상에 나서겠다고 선회한 상태다.
◇ 트럼프, FTA 협상도 미치광이 식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NAFTA와 관련한 입장 변화를 보면 향후 다른 국가와의 FTA 협상을 어떻게 이끌고 갈지 점쳐볼 수 있다. NAFTA 재협상은 향후 미국이 한국 등 다른 18개국과 체결한 모든 FTA 재협상의 본보기로 주목받고 있다.
NAFTA를 겨냥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극과 극’을 오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NAFTA를 일자리를 빼앗아간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전면 재협상을 약속했다. 재협상 결과가 미국 노동자에게 불리할 경우 탈퇴하겠다는 엄포도 놨다.
특히 멕시코산 제품에 20%의 수입 관세를 물리겠다는 발언을 반복하면서 NAFTA 재협상은 뜨거운 감자로 자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후 멕시코, 캐나다와 재협상 개시를 서둘렀고, 멕시코나 캐나다도 재협상에 나서겠다고 나섰지만, 아직 공식 절차 개시는 의회에서 가로막혀 하지 못했다.
초조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1994년 발효 이후 23년 만에 NAFTA 종료를 발표하려 했다. 지지자들에게 미국 무역정책을 뒤집기 위한 조처를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과 트뤼도 캐나다 대통령 등 정상들이 잇따라 전화를 걸어 재협상 종료를 만류하면서 그는 입장을 전면 뒤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정상은 재협상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나는 종료하기보다는 재협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종료와 같은 극단적인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게 된 것은 백악관 내 그의 참모 중 소수파인 국수주의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미국 언론들은 풀이했다.
이같이 180도 바뀐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은 특유의 ‘미치광이 이론(the Madman Theory)’에 따른 협상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구사한 이 전략은 이는 상대에게 미치광이처럼 비침으로써 공포를 유발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전략을 말한다.
그가 30년 전인 1987년 출간한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 공개했던 협상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상대방과 갈등 상황에 부닥치면 먼저 협상의 지렛대로 ‘최악의 상황’을 제시해 엄포를 놓음으로써 위기를 조성한 뒤에 실리를 챙기는 방식이다.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 상황을 봐도 트럼프 행정부는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고 있다.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이나 유럽연합(EU)과는 새로운 양자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한편, 한미 FTA는 개정하고 중국과의 투자협정은 되살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의 유산 중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는 탈퇴했지만, 범대서양무역투자협정(TTIP)이나 중국과 양자 투자협정은 되살린다는 방침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 “NAFTA 종료 협박하다 실제로는 완만한 수정”
트럼프 행정부가 NAFTA 재협상을 시작하려면 무역촉진권한법(TPA)에 의거, 협상을 시작하기 90일 전까지 의회에 제출하고 초안을 브리핑해야 한다.
하지만 브리핑 주체인 로버트 라이시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내정자가 아직 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해 재협상을 위한 공식 절차가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달 초 라이시저 대표가 마침내 인준을 받은 뒤 90일간의 의회 회람 기간을 거치면 캐나다, 멕시코와의 공식 재협상은 8월 초에나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미국 언론들은 내다보고 있다.
로스 상무장관은 최근 WSJ과의 인터뷰에서 연내 NAFTA를 완전히 개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수년 걸리는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내년 여름 멕시코에 선거 일정이 있어서 연내에 끝내지 않으면 멕시코 의회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사실 NAFTA를 종료하면 미국은 무관세 특혜를 잃게 돼 관세부담이 크게 증액되기 때문에 실리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로 인한 고용감소와 미국의 대멕시코 무역적자를 맹비난해왔지만, NAFTA 종료로 미국과 멕시코 간 무관세 특혜가 사라지고 다른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과 같이 최혜국대우 세율이 적용됐을 때 관세부담 증액분을 추산해보면 미국이 연간 약 100억 달러로 66억 달러인 멕시코를 상회한다.
이런 상황은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의회에 제출한 NAFTA 재협상 개시 의사 초안에도 반영돼 있다.
미국 USTR이 지난달 말 의회에 사전 제출한 초안은 대대적인 개정보다는 완만한 수정의 논조를 띠고 있다고 미국 언론들은 풀이했다.
초안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재협상에서 미국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경우 멕시코와 캐나다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거나 부활시킬 수 있는 재량권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또 반덤핑 및 상계관세 심사와 분쟁해결조항의 폐지도 명시했다.
기존에 공언해왔듯 멕시코산 제품에 20%의 수입관세를 부과하는 내용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밖에 무역환경 변화에 따라 지식재산권이나 전자상거래, 무역구제조치 강화를 위한 추가 조항 마련과 무역적자 해소와 고용창출 관련 조항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국무역협회는 분석했다.
또 노동환경 관련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멕시코의 인건비를 상승시켜 미국의 고용경쟁력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다고 협회는 덧붙였다.
◇ PIIE “트럼프 한미FTA 재협상서 쌀시장 개방, 자동차시장 접근확대 요구할 것”
비슷한 상황은 한미 FTA를 둘러싸고도 반복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아직 재협상과 관련한 공식 통보를 받지 못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FTA 종료를 언급하면서 엄포를 놓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미FTA는 재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지만, 최근 북한문제로 인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 간 무역마찰은 한미동맹이 약화했거나 불협화음이 있다는 신호가 될 수 있으므로 개정의 정도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는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 FTA 재협상에서 특정 시장 접근양해 확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자동차시장의 원산지규정이나 배출기준, 그동안 FTA에서 제외됐던 쌀시장, 금융서비스시장에서 국경을 넘어선 데이터 흐름 관련 규제 등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환율조작을 방지하는 의무조항도 요구할 수 있다.
PIIE는 “한국의 새 정부에게는 한미FTA 재협상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면서 “미국 측이 자동차와 쌀시장의 새로운 쿼터와 환경이나 노동, 공기업 관련, TPP에서 차출한 규정 도입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구소는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측의 요구가 한국에서 강력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위험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면서, 최근 북한 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한미FTA에 대한 개정 열의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PIIE 제프리 쇼트 선임연구원은 “한미FTA 재협상은 한국의 수입정책에 작은 개정과 TPP 수준의 새로운 외환 규정 도입에 그치고 핵심 협의 사항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며 “한미FTA 앙코르 상연이 있겠지만, 짧고 조화로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PIIE는 한미FTA가 발효된 지 5년이 지났지만, 미국 입장에서 봤을 때 무역규모는 당초 예상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수출은 증가하지 않았지만, 한국으로부터의 상품수입은 20% 증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지난해 대한 상품수지 무역적자는 277억 달러에 달했다. 대신 미국의 2015년 기준 대한 서비스수지 흑자는 90억 달러였다.
이같이 한미FTA로 인해 대한 수출규모가 늘지 않은 것은 이 협상이 발효되기까지 시간을 끌면서 한국이 잇따라 다른 국가들과 FTA를 체결하면서 한국시장 내 경쟁이 치열해졌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회복이 더뎠기 때문이라고 PIIE는 분석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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