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詩가 내린 서울마당/황수정 논설위원

[씨줄날줄] 詩가 내린 서울마당/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입력 2017-07-19 22:24
수정 2017-07-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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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신경림, 정현종, 신달자, 이근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자가 그대로 시(詩)의 우주인 사람들이다. 어느 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만도 흔감할 일인데, 대시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서울 세종대로는 그야말로 한여름 밤의 꿈마당이었다.
창간 113주년을 기념해 그제 밤 서울신문사가 사옥 앞 서울마당 특설무대에 꾸민 ‘한여름 밤 광화문 시 낭독회’에서 이들은 자작시를 골라 낭송했다. 시인 출신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안도현·함민복·정끝별·곽효환 시인이 함께했다. 모두 대표 시 한 구절만으로도 가슴을 부풀게 하는 중견 스타 시인들이다.

훈풍마저 불어 준 서울마당 잔디밭에는 주옥같은 시편들이 쉼 없이 구르고 또 굴렀다. 수원 자택에서 배낭을 메고 버스를 타고 걸음한 고은 시인은 형형한 눈빛으로 무대를 열었다. 낭독할 원고를 손수 적어 온 시인은 84세의 문학청년이 되어 자작시 ‘어느 전기’를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읊어 내려갔다. 81세의 신경림 시인은 아예 원고도 없이 가장 아끼는 작품을 암송했다. 어머니의 그리움이 행간에 흘러넘치는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를 낮은 목소리로 외울 때 객석도 따라 그리움에 잠겨 말을 잃었다. 팔순의 원로 시인들은 낭독회가 진행된 2시간 동안 잠시도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시인들의 낭송에 곁들인 무대는 여름밤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배우 박정자와 손숙이 직접 고른 애송시 ‘신부’(서정주)와 ‘남사당’(노천명)을 읊조릴 때는 퇴근길 시민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두 편의 깜짝 시도 등장해 시민 관객은 물론 시인들의 박수를 받았다. 초대 손님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인들의 시인’인 김수영의 ‘여름밤’으로 분위기를 띄우자 김영만 서울신문 사장은 윤동주로 화답했다. 김 사장은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을 읊으며 “113년 된 서울신문도 이런 마음”이라고 의미를 새겼다.

일찌거니 무대를 찾아 리허설까지 했던 손숙은 “시를 낭송한다는 것은 인문학적 가치를 일깨우는 작업”이라며 “메마른 시대에 위로를 주는 흐뭇한 무대”라고 말했다. 모시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대미를 장식한 소리꾼 장사익은 흥에 겨워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에 곡을 붙인 작품을 처음 발표하기도 했다.

시가 있는 곳이 어디든 문학의 우주는 그저 열린다. 시인들의 담박한 육성으로만 채워진 무대는 신통하게도 8차선 대로변의 소음도 뚫었다. 세상의 소란을 잠재우는 절창에 여름밤이 저물었고, 객석의 시심(詩心)은 노을보다 더 붉었고.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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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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