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2005년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겸재 정선(1676~1759)의 화첩을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려받았다. 이 화첩은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대원장이 192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첩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발견해 국내에 알린 사람은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다.
그는 1964년 제2차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다. 아헨의 탄광에서 3년 계약 근무를 마치고 쾰른대학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973년 도서관에서 노르베르트 베버 대원장이 1927년 출판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를 읽다가 ‘금강내산전도’(剛內山全圖)를 비롯한 세 폭의 겸재 그림 사진을 보게 된다. 1975년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가 지하 선교박물관에서 조선시대 민속유물과 함께 ‘일출송학도’(日出松鶴圖)가 펼쳐진 겸재 화첩을 발견한다. 그는 ‘베버 신부의 책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그림 말고도 18폭의 겸재 그림이 더 있었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화첩은 곳곳에 좀이 슬어 어떤 그림은 제목조차 읽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박물관 담당 신부는 뜻밖에 진열장 열쇠를 내주면서 마음껏 꺼내 보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유 전 교수가 사진을 찍으려고 동행한 독일인 교사와 간이식당 식탁 위에 너덜너덜하고 때가 묻은 화첩을 펼쳐 놓는 순간 식사 당번인 젊은 수사가 “이건 또 뭐야” 하며 화첩을 밀쳐 버렸다. 두 사람은 도망치듯 울타리 밖으로 나가 수도원 대문에 그림을 기대어 놓고 사진을 찍었다.
화첩은 두 차례 소실 위기를 넘겼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1980년 초 뮌헨의 바이에른주립 고문서연구소에서 일하던 베네딕도회 수녀에게 화첩의 보존 처리를 맡겼다. 그런데 아파트에 불이 나는 바람에 수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화첩도 타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고문서보관소에 있었다. 2007년에는 왜관 수도원 본관에 화재가 일어나 문서고에 보관하고 있던 화첩을 피난시킨 일도 있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맡겨 안전한 수장고에서 보관하고 있다.
유 전 교수의 회고담은 ‘왜관 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 정선 화첩’에 담겨 있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의 ‘돌아온 문화재 총서’ 첫 권이다. 이 책에는 화첩의 귀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선지훈 신부의 글도 실려 있다. 왜관 수도원에 ‘겸재 정선 화첩 귀환 기념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남은 꿈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된다면 문화가 풍성하다고 할 수 없는 왜관이 문화 기행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발돋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그는 1964년 제2차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다. 아헨의 탄광에서 3년 계약 근무를 마치고 쾰른대학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973년 도서관에서 노르베르트 베버 대원장이 1927년 출판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를 읽다가 ‘금강내산전도’(剛內山全圖)를 비롯한 세 폭의 겸재 그림 사진을 보게 된다. 1975년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가 지하 선교박물관에서 조선시대 민속유물과 함께 ‘일출송학도’(日出松鶴圖)가 펼쳐진 겸재 화첩을 발견한다. 그는 ‘베버 신부의 책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그림 말고도 18폭의 겸재 그림이 더 있었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화첩은 곳곳에 좀이 슬어 어떤 그림은 제목조차 읽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박물관 담당 신부는 뜻밖에 진열장 열쇠를 내주면서 마음껏 꺼내 보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유 전 교수가 사진을 찍으려고 동행한 독일인 교사와 간이식당 식탁 위에 너덜너덜하고 때가 묻은 화첩을 펼쳐 놓는 순간 식사 당번인 젊은 수사가 “이건 또 뭐야” 하며 화첩을 밀쳐 버렸다. 두 사람은 도망치듯 울타리 밖으로 나가 수도원 대문에 그림을 기대어 놓고 사진을 찍었다.
화첩은 두 차례 소실 위기를 넘겼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1980년 초 뮌헨의 바이에른주립 고문서연구소에서 일하던 베네딕도회 수녀에게 화첩의 보존 처리를 맡겼다. 그런데 아파트에 불이 나는 바람에 수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화첩도 타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고문서보관소에 있었다. 2007년에는 왜관 수도원 본관에 화재가 일어나 문서고에 보관하고 있던 화첩을 피난시킨 일도 있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맡겨 안전한 수장고에서 보관하고 있다.
유 전 교수의 회고담은 ‘왜관 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 정선 화첩’에 담겨 있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의 ‘돌아온 문화재 총서’ 첫 권이다. 이 책에는 화첩의 귀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선지훈 신부의 글도 실려 있다. 왜관 수도원에 ‘겸재 정선 화첩 귀환 기념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남은 꿈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된다면 문화가 풍성하다고 할 수 없는 왜관이 문화 기행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발돋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4-12-11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