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구 논설위원
대통령과 정부의 약속은 어떤 여건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고 집권 정당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떠벌리고 실행되는 일은 별로 없이 헛방만 놓는 정부와 집권 정당을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특히 인사 문제는 다른 정책 공약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인사 소외감은 정책 불신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역대 정권마다 인사 문제는 국민을 실망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국정농단도 문고리 3인방 등 인사 문제에서 싹이 자랐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 선거과정이나 취임 초엔 탕평인사, 공정한 인사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지만 막상 인사 뚜껑이 열리고 나면 실망을 안겨 주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헛방’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문재인 정부 역시 역대 정권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과정을 답습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문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이나 취임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코드, 보은, 낙하산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야당 지도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도 인사만큼은 공정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약속들을 믿는 국민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인사잡음이 곳곳에서 끊이질 않고 반복되고 있는 탓이다.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의 낙마를 비롯해 그동안 장·차관급의 고위 공직자 7명이 검증 과정에서 탈락하는 등 역대 어느 정권보다 참혹한 성적표를 받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공공기관장과 임원 인사는 새 정부의 도덕성과 정치 철학을 더욱 의심케 할 여지가 크다. 여당은 야당 시절 때부터 공공기관장의 임기는 절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정권이 바뀌어도 법률이 정한 공공기관장의 임기는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당시 정연주 KBS 사장을 임기 만료 전에 해임했다가 엄청난 야당의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소송에서 패소한 예도 있었다. 얄궂게도 지금도 당시와 비슷한 양상이 공공기관 곳곳에서 빚어지고 있다. 또 ‘헛방’이 된 셈이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공기관의 장이나 임원들은 임기를 보장받는다. 자율경영 및 책임경영 체제를 확립해 경영 합리화와 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공공기관의 대국민 서비스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선의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법은 무시되는 게 관행처럼 돼 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최근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공공기관장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한 기자회견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노골적으로 법을 무시하고 내 편만 끌어안고 가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 정부와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코드인사, 낙하산 인사를 그대로 답습하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더구나 최근 잇따르는 감사원 등 사정 당국의 공공기관장 비리 발표는 인위적인 교체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해 온 문재인 정부의 약속들을 무색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정권이 바뀌거나 시대가 변하면 과거의 인물은 물갈이되는 게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검찰총장이 바뀌면 동기나 선배 기수가 물러나는 것이 관행화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이치에 맞다. 그렇다면 잘못된 제도를 개선하든지, 관행을 바꾸어야 한다.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대통령의 임기에 맞추든지, 1년 단위로 축소하든지, 임기를 보장하든지 특단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공공기관의 인사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헛방 놓기’(미덥지 아니한 말이나 행동)부터 해야 하는 풍토는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
yidonggu@seoul.co.kr
2017-09-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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