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 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한강 ‘저녁의 소묘 5’
번역을 하면서 정말 고민되는 부분은 난해한 어휘가 들어간 구절이 아니다. 쉬운 단어로 돼 있어 얼핏 심심하게 넘어가는 구절이 끝내 목에 걸린 듯 남아 마침표를 쉽게 찍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시를 영어로 번역하던 새벽이 그랬다. ‘살아 있으므로’의 일.
주어 없이 진행되는 시에서 독자는 나무를 바라보는 어떤 이의 시선이 시인과 멀지 않다고 짐작할 것이다. 그래서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이의 그 참을성 많은 태도에 ‘아’ 하는 낮은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그런데 괄호로 처리된 그 작은 속삭임이 내게 동시에 말한다. 살아 있음은 나무의 일인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는 이의 일이라고. 이 시선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라고. 검은 나무 밑동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그래, 나무만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은 나무를 새롭게 바라보는 이도 살아 있기에 그 시선이 가능한 거였다. 이때 살아 있음은 생물학적 차원의 목숨이 아니라 버려지고 가려진 것을 발견하는 어떤 정성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는 않은 시선이다. 그래서 세상의 폐허 속에서도, 패배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발견하는 이가 시인이라 했던가.
그 발견은 시의 독자로서 내게 기쁨을 주었지만 번역가로서는 곤혹의 시작이었다. 나무와 나의 만남. 우리의 살아 있음. 살아 있음의 주체가 나무뿐만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내 직관적인 읽기 앞에서 그 이중의 의미를 주어를 둘로 쓰지 않고 살려내야 했다. 이런 이야기를 시인과 두런두런 나누던 여름 끝자락. 번역은 힘들었지만 죽은 줄 알았던 나무의 살아 있음과 이를 바라보는 이의 살아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우리가 좁은 골목을 걸으며 나눈 것은 어떤 우정이었다. 살아 있어 가능한 대화였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적 등가성을 찾는 기계적 작업이 아니라 기민한 읽기이자 살아 있는 대화다. 나는 운이 좋았다. 작가가 살아 있어서, 우정을 나눌 수 있어서.
그럼 작가가 떠난 작품을 번역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럴 때도 번역가는 작품을 곱씹어 읽으며 우정을 나눈다. 그러다 많은 경우의 수 중 어떤 선택에 이른다. 시 읽기도, 번역도 즐거운 대화이자 결단이자 환대인 이유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줄 모르고 쉽게 파괴하고 죽이는 이 난폭한 세계의 한 자락에서 그날, 연한 시의 시선이 전해 준 강인한 생명의 힘으로 나는 한숨 대신 깊고 너른 숨을 쉬었다.
2023-08-2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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