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영화감독
3년 전 여름 첫 장편영화 촬영을 앞둔 나는 유년 시절을 보낸 성북구의 주택가들을 종일 이리저리 배회하며 돌아다녔다. 영화의 또 다른 얼굴이 될 로케이션 헌팅은 캐스팅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특히나 저예산 독립영화의 프로덕션에서는 감독이 직접 발로 뛰며 찾는 게 여러 모로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로 멋지게 포장했지만, 사실 속내는 그저 괴롭고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예산은 빠듯한데, 준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시나리오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오랜 시간 꿈꿔 온 일을 너무나 제한적인 상황에 맞춰 얼렁뚱땅 해치워 버리는 느낌만 들었고, 그 어떤 과정도 즐겁지 않아 더더욱 괴로운,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오직 걷는 것밖에 없었던. 그런 시기였다.
그날도 그렇게 잡다한 상념에 사로잡혀 종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동네 떠나갈 듯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젖혔다. 바로 현정이었다. 작은 승용차에 너댓 살쯤 되는 딸과 친구들을 가득 실은 그녀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하고, 기운찼던, 그 시절 내 단짝의 얼굴 그대로였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며 어쩐지 기묘해 보이는 각자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는, 금세 다시 볼 것처럼 기쁘게 헤어졌다. 이후 우리가 잠시나마 스치듯 인사할 기회를 잡았을 때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내 첫 영화가 개봉한 무렵이다. 다시 영화처럼 순식간에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며칠 전 그런 현정이와 오랜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했다. 제대로 약속을 하고 만나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건 대학로에서의 만남 이후 10년 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말의 어색함도 없이 꼭 중학생 때처럼 떡볶이와 김밥을 입속에 잔뜩 욱여넣은 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이미 수십 번은 곱씹었을 그 시절 사건 사고들을 새로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가 하면, 또 난데없이 탄핵 인용을 축하하며 정체성을 숨긴 급진좌파로 마주해야 했던 고통스럽고 웃긴 일화들에 대해 경쟁적으로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한순간 시간에 쫓겨 이젠 정말 자주 보자고, 꼭 열다섯 살 소녀들처럼 온 마음으로 활짝 웃으며 헤어졌다.
이제 우린 또 어떤 세월을 지나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까.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먼 훗날의 만남을 고대하며, 나는 오늘 하루 또 이렇게 힘이 난다. 더 잘 살아야겠다.
2017-04-06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